UPDATED. 2024-04-17 06:30 (수)
정치와 권력을 잃은 무능한 국가에 질문을 던지다
정치와 권력을 잃은 무능한 국가에 질문을 던지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0.21 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_ 『위기의 국가』 지그문트 바우만·카를로 보르도니 지음 | 안규남 옮김녘 | 298쪽 | 16,000원

 

바우만은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났다. 이후 1971년 영국 리즈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1990년 정년퇴직후 리즈대와 폴란드 바르샤바대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바우만의 이름이 세계 지성사회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에 출간한 『근대성과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해서다. 이후 1990년대에는 탈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했으며, 2000년대에는 현대사회의 유동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한 ‘액체근대(Liquid Modernity)’시리즈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그의 신작 『위기의 국가』는 정확히 말하면 이탈리아 사회학자 카를로 보르도니와 함께 쓴 책이다. ‘토론’ 형식으로, 카를로 보르도니와 바우만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묻고 대답하는 구성을 취했다. 번역 시차 문제도 매우 고무적이다. 원전 출간-번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직접 저작권을 갖고 있는 현지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건네받아 이를 번역한 탓에 영문판 출간과 우리말 번역본의 시차가 거의 없게 됐다.


바우만·보르도니의 이 책은 일련의 뚜렷한 지적 관심사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시작된 ‘정의 열풍’, 이창곤의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오건호의 『나도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다』 등 ‘복지국가 논쟁’을 거쳐 최근에는 우리가 믿어왔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면서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은 서서히 ‘국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2011년 출간된 김상봉·박명림의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최근 작가들이 함께 쓴 『눈먼자들의 국가』 등은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환기하기에 충분한 지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미셸 푸코는 1978년 발표한 한 문제적 논문에서 “국가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은 혼성적 현실, 신화화된 추상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의 근대에서, 즉 우리의 현재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의 국가화가 아니라 제가 국가의 ‘통치화’라고 부른 것일지 모릅니다”라고 지적했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치’가 과도하게 팽창하고 있는 국가의 비정상적 ‘통치술’을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현대 국가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우만은 푸코의 지적 계보에 서지 않는다. 그는 홉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스미스, 포퍼, 하이에크, 보댕 등의 고전 사상가와 하버마스, 벤야민, 발리바르, 바티모 등 최근 사상가들의 줄에 서서 다양한 국가론의 기원과 이념적 갈래를 고찰하고, 이를 토대로 오늘의 국가론을 분석, 조명하며,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했다.


이 책에서 표나게 드러나는 것은 바우만이 일찍이 호명해냈던 ‘액체근대’·‘액체사회’라는 개념들이다. 이들은 바우만의 독창적 개념으로,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원리였던 구조·제도·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보았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사회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다. 그가 작금의 국가를 ‘위기의 국가’로 이해하는 프레임이 이해되는 지점이다.


바우만은 이제 국가가 뭔가를 해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진단한다.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을 ‘국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섭섭한 주장이다. 그가 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지금의 ‘위기’는 예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권력과 정치가 분리되면서 세계를 움직이는 실질적 권력이 국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미 넘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현재의 위기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라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출현했던 위기들과 다릅니다. 권력과 정치의 분리는 모든 ‘위기’가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 즉 나아갈 길을 선택하고 거기에 필요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는 주체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부재는 별거 중인 권력과 정치가 다시 합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계속해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바우만은 오늘날 비정상적인 국가를 일컫는 ‘국가 없는 국가주의’라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치만 하는 비정상적 통치를 들여다본다(제1장). 그런데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국가의 위기, 또는 위기의 국가를 초래한 것은 ‘모더니티’에 있다. 여기서 보르도니는 근대가 약속을 저버린 것 아니냐고 따져묻고, 바우만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근대가 자신의 약속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고 응수하면서 흥미로운 ‘모더니티 논쟁’을 전개한다(제2장).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 위기’ 문제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두 사람은 민주주의 미래에 시선을 옮긴다(제3장).


“오늘날에는 본래적이고 옳은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과거 세계의 찬탄할 만한 매력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이상입니다.”


이렇게 이 책은 서구에 닥친 위기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과 관련돼 있으면서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심원한 변화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데, ‘위기’에 대한 인상적인 분석과 더불어,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지적 풍경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