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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평화상 '말랄라'가 던진 질문
노벨 평화상 '말랄라'가 던진 질문
  • 조은영 원광대·미술과
  • 승인 2014.10.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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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수 칼럼] 조은영 원광대·미술과

17세의 말랄라는 무수한 순간을 무심하게, 혹은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침묵으로 지나치는 우리 어른들을 되볼아보게 했다.

파키스탄 출신의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17세 약관의 소녀로 2014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수년간 유난히 수상자 선정의 정치성 논란이 제기돼온 평화상 부문에서 개인, 단체를 포함해 300여명에 가까운, 역대 최다 후보군 중 역사상 최연소 수상자가 됨에도 각계에서 환영과 동조가 이어지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 곤경과 억압을 무릅쓰고 여성·아동의 교육권을 위해 싸워온 인권운동가로 급부상한 말랄라에게 탈레반이 트위터로 보낸 위협조차 오히려 그녀가 맞서온 거대한 적과 실상을 사람들이 실감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10대 중반에 여성이 교육받을 기본권을 주장한 대가로 총격당한 후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말랄라가 1년 전 2013년 10월 19일 <CNN>에서 크리스티안 아만푸르 기자와 나눈 인터뷰가 기억난다. ‘내가 침묵하면 그 상태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기에, 차라리 말을 하고 죽는 편이 더 나아요. …… 그들이 내 몸을 총으로 쏠 수는 있어도 내 꿈을 쏠 수는 없어요’라고 역설하던 모습은 무수한 순간을 무심하게, 혹은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현명하게’침묵으로 지나치는 우리 어른들, 특히 교육계에 종사하는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석기시대도 아니고, 중세나 근대도 아니고, 현대, 하물며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왜 우리는 아직도 이토록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책무를 미성년 여자아이가 맡게 하고 있는가. 멀리 파키스탄의 상황만이 아니다. 이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상황이요, 여성 문제에 있어서 가장‘선진화’된 미국 등 서구권에도 해당된다.

필자가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수년간 재직할 때, 여성들이 미연방 정부기관 근무자임에도 인사 문제가 거론되면 ‘이등시민’미국여성, 능력과 무관하게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 ‘백인 남자애(white male boys)’들이 누리는 특혜에 대한 토로가 그치지 않았다. 학계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politically incorrect)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개선된 편이지만, 정치, 언론, 기업 등 대부분 영역에서 여성이 넘어야 할 유리천장의 장벽이 여전히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적 상황은 한층 심각하다. 빠르게 진행된 근대화, 현대화가 거의 서구화에 의존된 탓에 한국과 서구의 장단점이 얽히면서 세대간, 성별간의 갈등양상이 극대화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필자가 워싱턴에서 미국 공무원들을 만났을 때(대다수 미국 대중은 북한과 전쟁가능성 이외에는 한국정치나 한류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한국이 여성을 국가 수장으로 선출할 정도로‘진보국’인 줄 몰랐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어야했다. 한국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어떠한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국가별 성평등을 평가하는 성격차 지 수 (Gender Gap Index)에서 2013년 우리나라는 136개국 중 111위를 기록했다. 물론 평가방법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국제적인 공식지표에서 결코 자랑스러운 성적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박 대통령 영국 방문 무렵, 공신력 있다는 <BBC>가 보도 서두에서“박근혜는 개발국가들 중 성불평등성이 가장 심각한 나라의 첫 여성 지도자”라고 소개했을 정도다.

대학원 시절 필자가 미국에서 겪은 일이다. 어느 가게에서 상품이 떨어져 있기에 조용히 주워 올려놓았더니 백인 중년남자 주인이 와서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네 나라에서는 남자가 여자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지”하고 웃었다. 당시에는 그의 무지와 선입견에 어이없었지만, 그 후 이십 수 년을 국내외에서 일하면서 유사한 업무를 해도 국내에서는‘여자’라는 이유로 해외보다 몇 배 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현실에 그 남자의 말이 비유적으로 옳지 않았나 종종 생각하게 된다. 여성이기에 겪는 소모적 시간낭비 탓에 직책들을 고사하다가도‘여성인력의 필요성’에 매번 설득당하는 것은 말랄라 같은 어린 친구들이 우리 어른의 책무를 떠맡는 대신 마음껏 활개 펼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싶어서다.

 

조은영 원광대·미술과
델라웨어대에서 박사를 했다. 미국 국립인문진흥재단(NEH) 펠로우 등을 지냈고, 현재 원광대 대외협력처장, 현대미술사학회장, 스미소니언박물관 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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