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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기 펄럭거리는 古都 … 말(言) 고민에 사막의 뜨거운 밤은 새벽까지 이어져
풍력기 펄럭거리는 古都 … 말(言) 고민에 사막의 뜨거운 밤은 새벽까지 이어져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10.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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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3. 포도의 고향 투루판(2)―투루판의 胡商들②

▲ 풍력발전기로 유명한 투루판. 사막 위에 세워진 무수한 풍력발전기들의 풍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사진 번춘방

십중팔구 월지의 후손일 가능성이 아주 큰 소그드인을 왜 중국인들은 胡라고 불렀을까. 胡는 처음에는 중국 북방, 漠北 혹은 장성 너머에 살고 있는 유목기마민, 특히 흉노를 지칭했다. 나중에는 五胡를 비롯해 중국 동북방, 북방, 서북방, 서방의 유목민을 모두 胡라 불렀다.

장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옛날 바닷새 한 마리가 魯나라 성 밖에 와 앉았다. 임금은 친히 이 새를 궁 안으로 데리고 와 좋은 음식과 술로 융숭하게 대접했다. 새는 진수성찬을 하나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기(以己養養鳥) 때문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以鳥養養鳥) 않아서다.”―『莊子』 至樂篇

중국 신강성의 성도인 우루무치에서 동남쪽으로 차를 달렸다. 불타는 도시 투루판으로 가는 길(거리 187km)이다. 바람이 거셌다. 자칫 넋 놓고 서 있다가는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갈만큼 바람의 강도가 대단했다. 그래서 머리 좋은 중국인들이 풍력발전기를 설치했다.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자연은 이용하기에 따라 인간생활에 이로움을 준다. 허허벌판을 가득 메운 풍력발전기의 장관을 구경하고자 도중에 차를 세웠다.


차만 세우면 사람들은 근심 풀 장소를 찾는다. 여행 중에는 언제 다시 화장실을 만날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이렇다 할 화장실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일단 큰 길에서 벗어나 사람들은 길 안쪽으로 가급적 멀리 들어갔다. 사용하지 않는 가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해 화장실로 변해 있었다. 남자들은 대충 문제 해결이 가능했으나 여자들은 서로 앞가림 뒷가림 해주며 동지애를 발휘해야 어색한 볼일을 볼 수 있었다. 큰딸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왔다. 그러나 안 되겠는지 코를 막으면서도 다시 險地를 찾았다.


한낮의 투루판의 기온은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듯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다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나는 머리가 빠질까 걱정했다. 양산과 우산을 꺼내 열기를 차단하고자 했으나 별 소용없었다. 사나운 바람에 뒤집히거나 날아가기 십상이었다. 묵묵히 참는 게 상책. 열내봤자 백해무익이다. 폐허의 교하고성 일대에서도 역시 뜨거운 바람은 사정없이 불어댔다. 혼줄이 나갈 지경이다. 어떻게 꼭대기까지 갔는지 모른다.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 본 성 아래로는 ‘강물이 절벽을 휘감고 돌면서 교차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交河故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삭막한 풍경은 별 매력 없었기에 사정없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더위를 가려주는 천막 아래서 당도 높은 수박을 허겁지겁 먹었다. 불볕더위를 견딘 데 대한 보상은 달콤했다. 달콤함에 마음이 풀리면서 생각이 포도에 미쳤다. 여기 투루판은 포도의 고장인데…….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찌아오허꾸쳉’이라고 불리는 교하고성은 투루판시에서 서쪽으로 13㎞ 떨어진 아르나이즈 계곡 위 30m 높이의 절벽 위에 배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한시대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이 고성 유적지의 길이는 1천650m요, 폭은 300m다. 이곳은 고대 서역 城郭諸國 중의 하나인 車師前王庭의 도시로 다른 서역국가와 통하는 실크로드 천산남로 상의 교통 요충지로서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는 6천500명. 한 왕국의 수도의 규모가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교하’라는 이름은 성의 위치에 따른 것이요, ‘거사’는 왕가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車師’를 ‘차사’가 아닌 ‘거사’로 읽는 연유가 그와 관련이 있다. 이곳 역시 龜滋(쿠차), 喀什爾(카시가르)와 마찬가지로 흉노에 내몰린 월지의 한 갈래가 앞서 거쳐 간 지역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연히 상당 기간 정착해 왕국을 수립했을 것이다. 이전 글에서 필자는 龜滋, 喀什가 공히 ‘玉’을 뜻하는 ‘쿠시’ 혹은 ‘카시’의 음차어일 것이라고 말했다. 車師 역시 그러하다.

투루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훨씬 이전 이곳은 월지연맹체를 구성하던 하위 집단 ‘카시’부족이 다스렸다. 때가 돼 월지는 가고 한족이 오고, 토번이 오고, 돌궐이 오고, 마침내 위구르가 왔다. 이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했다. 지배세력이 누구인가는 상관없이 오갈 데 마땅찮아 정착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때그때 지배집단의 관리들에게 세금 바치고 눈치 보며 삶을 연명했다. 8세기, 키르기즈에게 쫓긴 위구르가 몽골초원을 벗어나 알타이 이서의 서역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천산과 파미르를 오가는 상인 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興胡(興生胡商의 줄임말)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흥호는 소그드 상인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하중지방에 근거한 昭武九姓이 다스리는 安國, 康國, 何國, 曺國 등 아홉 나라 출신으로 서역과 위진을 거쳐 수, 당으로 이어지는 중국을 오가며 상업 활동을 하던 무리를 말한다. 왜 昭武九姓이며, 昭武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우즈베키스탄의 도시들 편에서 살펴보려 한다.


유능한 상인집단 소그드인 흥호에 대한 재미있고 인상적인 기록이 여기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발견됐다. 귀족들의 묘지인 아스타나고분 (阿斯塔那古墓)은 고대 高昌國과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묘지로, 대략 3~8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아스타나(Astana)는 ‘휴식’을 뜻하는 위구르어로, 결국 아스타나 고분은 ‘영원히 잠든 묘지’ 또는 ‘휴식의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인 1916년 외국 탐험대에 의해 처음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교하고성 사진 권오형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 집단에는 소그드 상인들 외에 아랍에서 온 상인, 유대인 상인, 인도 상인, 토하리스탄 상인, 중국 상인, 로마 상인, 심지어 고구려, 신라 상인들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다 적당한 지점에 이르면 발길을 멈추고 하루의 여정을 접었다. 그들이 머무는 곳 거기에 대상숙소, 카라반세라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개 사람과 짐 실은 낙타가 하루 이동할 수 있는 거리 25~30km 정도의 범위 내에 자연스레 오늘날의 여관 내지 주막이 형성된 것이다.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름에 따라 오아시스 도시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이들이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각종 사원도 세워졌다. 시장이 있고, 사원이 들어서고, 숙박업소가 등장하니, 대부업체 내지 금융기관도 문을 열었다. 남성들의 객고를 푸는 색주가도 슬그머니 틈새를 파고들었다. 자고로 돈 되는 데 양심은 없는 법이다. 돈을 쫓아 사람들은 이동한다. 한인들의 투루판 이주 물결은 3~4세기경 시작됐다.


실크로드 무역의 중요 거점 지역 투루판의 상권을 쥐락펴락한 세력은 중국인들이 興胡라 부른 소그드 상인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업 상인들은 투루판에 상주하지 않고 항시 자신들의 상품과 가재도구를 지니고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끊임없이 이동을 하며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로 먹고 사는 교역도시 투루판 주민들의 상층부에는 교역활동을 관리 감독 장려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행정관리들이 있었다. 다양한 언어사용자들이 모여들다보니 통역인들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여행자 숙소 주인과 종업원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순례자들, 짐꾼들, 매춘부들, 온갖 군상이 투루판 경제를 움직였다. 도시 외곽에서는 농민들이 별개의 자립적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대부업자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상인들에게서 물건을 구입했다. 물건 중에는 말과 양 같은 가축은 물론 노예도 포함됐다. 그리고 구매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 외에 법적 조서, 여행 허가증 등 남아있는 이런 기록들을 통해 과거 투루판 사람들의 생활상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투루판은 과거 기원전 2~3세기경만 해도 高車族의 터전이었다. ‘高車’란 명칭은 이들이 높은 수레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들 토착인의 성은 翟(적)이었다.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이방인인 한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자로 車師 혹은 古師라고 기록했다. 이 둘은 한 소리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 본래 이 땅의 주인이던 원주민은 반 유목민이었다. 밀농사와 같은 농업활동에도 종사했다. 중국 사서에서 포도주가 많이 생산된다 했음에 비춰 포도 생산에도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후한서』 권88은, “(이들은) 짐승털로 짠 천막에 살며 가축에게 먹일 수초를 따라 이동한다. 농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라고 그들의 생활상을 전한다.


현재 우루무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출토 유물들을 보면 과거 투루판 주민들의 민족적 구성이 한족 일색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06호 무덤 속에 매장된 입상 중 마부상은 무덤의 주인이 중앙아시아 출신이었을 것임을 강력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마부들이 쓴 끝이 뾰족한 펠트 모자는 오늘날 키르기즈 남자들이 쓰는 전통모자와 흡사하며,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스키타이의 뾰족 모자를 닮았다.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언어 자료다. 한족 외에 투루판 주민을 구성한 종족 내지 민족은 누구였을까. 각종 문서에 남아 있는 이름이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唐代의 사료에 昭武九姓이라 기록된 소그디아나(파미르와 천산산맥 이서의 중앙아시아) 출신들이다. 이들이 투루판 상권의 핵심세력인 소그드 상인 興胡인 것이다. 가장 흔한 소그드 성은 앞서 보았듯, 康, 安, 曺, 何, 米, 史, 石 등이었다. 그 밖에 翟, 羅라는 성도 눈에 띈다.


‘昭武’를 일본학자 요시다 유타카(吉田豊)는 ‘보석’이라는 소그드어 jamuk의 음사로 보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 월지가 흉노에 쫓겨 소그디아나 지역으로 서천하기 전 원 거주지가 昭武城이었다. 소그디아나를 장악한 월지의 무리는 한시도 떠나온 고향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9개국의 國姓을 昭武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昭武九姓이다. 昭武라는 고향의 성 이름을 국성으로 쓰기로 한 9개의 월지부족이 이들이다. 월지인들의 말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 분명한 ‘昭武’의 음가는 어떠하며 또 이 말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아무다리야강 북안에 자리 잡은 중심국가 康國(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역)의 王姓은 본래 溫이었다. 중국학자들은 이주 전 월지족의 터전인 돈황과 감숙 사이 기련산맥 북쪽에 있었다는 소무성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黑水城 유허에 비정한다. 과연 그러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십중팔구 월지의 후손일 가능성이 아주 큰 소그드인을 왜 중국인들은 胡라고 불렀을까. 胡는 처음에는 중국 북방, 漠北 혹은 장성 너머에 살고 있는 유목기마민, 특히 흉노를 지칭했다. 나중에는 五胡를 비롯해 중국 동북방, 북방, 서북방, 서방의 유목민을 모두 胡라 불렀다. 급기야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서역의 이민족마저 胡의 범위 속에 집어넣었다. 한편 8세기 당나라에서 간행된 『梵語雜名』에서는 胡가 범어로 蘇(Suli)라 적어 관심을 끈다.


『범어잡명』의 편찬자인 쿠차 출신 승려 利言 혹은 禮言은 “高麗 즉 고구려는 畝俱理(Mukuli)”라 했다. 왜 무쿠리며 이 말은 또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범어 명칭이 존재하는 이상 당시 고구려가 서역제국 못지않게 인도와 교류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를 지칭하는 Muk(u)li를 돌궐비문의 B??kli와 대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돌궐제국의 제2대 可汗 묵철(默: ?~716년)의 성은 짐작하다시피 阿史那 즉 아시씨다. 묵철은 보직명(소지방 장관) 내지 아명이고 황제가 된 후의 돌궐어 명칭은 ‘정복자’라는 의미의 카프간 카간(Kapagan Kağan)이다. 초대 황제 일테리시 카간(İlteriş Kağan) 즉 힐질리시의 동생으로 관직명 묵철은 돌궐어 Bok-chor의 음사다. 이렇듯 한자음 ‘ㅁ’은 돌궐어의 ‘b’와 대칭을 이룬다.


몽궐초원을 중심으로 막강한 제국을 건설했던 돌궐은 범어로 覩娑迦(Turusaka)라 한다고 『범어잡명』의 편찬자는 말한다. 스키타이(Scythai)와 한 갈래일 것으로 의심되는 사하족(Saha)과 무슨 친연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그러나 이런 추정이나 의심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한다. 이번 글에서는 胡를 가리키는 범어 蘇(Suli)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지칭하는 가를 알면 족하다. 돈황과 투루판 출토 문서 연구 전문가인 동양사학자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같은 이는 蘇(Suli)가 수그딕(Suγδik)의 한자 음사어로 소그드를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언어학자인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Muk(u)li 내지 Bökli가 貊을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의 나라인 貊國의 표기라면, Suli는 Su의 나라(li)여야 한다. Su는 과연 무엇일까. 고민은 깊어진다. 돌궐어로는 Su가 물이다. 그러나 Suli는 범어다. 혹 Su는 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胡國은 털 긴 소 야크를 많이 길렀다. 티베트인들은 소를 방언에 따라 So 혹은 Sog라고 불렸다. 세상에는 뜻밖에도 닮은 말이 많다. 이런 저런 말고민에 투루판의 뜨거운 밤은 새벽으로 이어졌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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