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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像國家속의 상상적 시민은 식민지 시대가 강제한 현실”
“想像國家속의 상상적 시민은 식민지 시대가 강제한 현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0.14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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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36회차 강연_ 송호근 서울대 교수,‘ 한국 근대사회의 기원’

▲ 사진 제공 네이버문화재단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문화의 안과 밖’강연이 드디어 본격적인‘근대성의 검토’에 들어섰다. ‘근대성의 검토’를 주제로 진행되는 7섹션은 전체 8개 섹션 가운데 가장 많은 8개의 강연으로 구성돼 있다(일정은 표 참조). 지난 4일 진행된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과)의‘한국 근대사회의 기원’은 8개 강연의 맨앞에 놓인‘검토’였다. 이날 발표와 토론에 할애된 시간은 2시간이었지만, 4시간이 지나도록 청중과 토론자, 발표자는 강연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대성의 검토’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뜨거운 주제인지 거듭 확인해준 자리였다.

송호근 교수는 1990년대 성장위주의 국가정책이 빚어낸 노동문제와 불평등의 한국적 결합구조를‘시장기제적 통제’로 이론화해 주목받았으며, 유럽사민주의와 비교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복지의 발현메커니즘에 관한 탁월한 업적으로‘제도주의적 정책사회학’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강연은‘한국 시민사회의 기원과 성장’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 위에서 진행됐지만, 그는 시종 강단 위를 옮겨 다니면서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열띤 강의를 펼쳤다. 그의 질문은 이미 상재된 두 권의 책『(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에서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근대국가는 언제 탄생했고 어떻게 성장했기에 오늘날 이런 모습을 띠었는가?”,“ 근대인과 시민사회는 어떻게 생겨났기에 식민지와 전쟁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사회로 치달았는?”라는 自問에서 시작된 사회과학적 탐색의 중간보고라고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송 교수는 그가 스스로 고안해낸‘말안장시대(1860~1894)’라는 흥미로운 용어로써 근대이행의 과정을 짚어내고자 했다. “말안장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갑오경장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가 마감된 이후, 갑오경장(1894)으로부터 한일강점(1910)에 이르는 근대이행의 과정(근대이행기) 속에서 근대인과 근대사회, 근대국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공론장(public sphere)’의 분석을 통해 규명하는 작업이 탐색의 핵심적 주제”라는 것.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말안장시대에 지배층과 인민의 분리는 서양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지만, 서양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통하여 왕권과 인민의 새로운 접합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와 공화정으로 전환했음은 근대를 입증하는 지표이다.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1860년대와 70년대는 인민과 지배층이 동일한 경험공간에서 헤어져 서로 다른 기대지평으로 나아갔던 시기였고, 그런 의미에서 서로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나였던 역사는 결국 두 개로 분리됐다. 인민의 역사와 지배층의 역사가 그것이다. ‘분리’와‘분화’는 지극히 불안하고 새로운 시간대를 동반했다. 인민의 역사는 동학이라는 문을 열고 나와 당시 확산일로에 있었던 고전소설과 서민예술을 자양분으로 해서 정체성과 고유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인민의 역사를 썼던 주역은 주체의식을 갖추기 시작했던‘자각인민’들이었는데 자아현실과 사회적 실상에 눈을 뜨면 뜰수록 텍스트공동체로서의 언문공론장은 활력을 더해갔다. 이에 반해 지배층의 역사는 내부 모순에 부딪혔다.”

그에 의하면, 갑오정권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근대이행기에‘공론장’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세 가지 변화가 발생했는데, 첫째, 조정담론장의 영향력 쇠퇴와 양반공론장을 계승한 지식인 공론장의 형성, 둘째, (동학으로 촉발된) 종교적 평민공론장의 세속적 평민공론장으로의 부활, 셋째, 지식인공론장과 평민 공론장의 상호 연대와 공명이 그것이다. 특히, 지식인 공론장과 평민공론장의 상호공명 현상은 조선 초유의 사건이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 이전까지 조선의 양반공론장 혹은 지배계급의 공론장은 평민공론장과 공명하기는커녕 접속한 일조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국민 개념을 만들어 평민을 공론장으로 불러들였고, 을사늑약에 의해 황제권이 약화되자 국가 만들기의 책임주체로서 국민을 적극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강점은 국민국가로 가는 현실적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렸고, 결과적으로‘국민’이 태어나자‘국가’는 사라진 셈이 됐다는 게 그의 독법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이‘국가는 소멸해도 개인과 사회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사회의 모체는 1894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자발적 결사체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라고 말하면서 송 교수는 이렇게 설명을 잇댄다. “근대 이행기 조선에서 태어난 개인, 결사체, 사회는 국가와의 대결구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소멸하는 국가를 회복해야 하는 태생적 운명을 부여받았다. 소멸하는 국가를 붙잡고 국권을 회복할 새로운 주체로서 국민이‘발견’됐다면, 이‘추상적 국민’을 작동시키고 활력을 불어넣는 구체적인 행위자가 사회였다.”형식적 국가가 소멸하는 자리에 정신적 국가(상상국가)를 설정한 지식인들은 국민정신, 역사정신, 민족혼을 담지할 구체적인 행위자를 호명했는데, ‘국민’이라는 관념적, 추상적 집합명사를 구체화할 수 있는 행위자는 바로‘개인’이고‘사회’였다. 즉, 소멸된 국가는 상상 속에서 재현됐고, 호명된 국민은‘상상국가’속으로 진입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과연‘시민’은 태어났는가.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송 교수의 진단이다. 개인은 시민, 사회는 시민사회를 향해 서서히 발을 옮기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시민됨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자율성’을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시민’과‘시민사회’의 출현을 낳았을지 모르는 조선의 근대이행은 그렇게 중단됐고, 시민의 탄생은 식민통치 하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상상력의 공간인‘문학’의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문학적이면서 비유적인 그의 결론은 이렇다.
“개인과 사회의 발전 양상을 고려한다면, 조선에서 적어도 초기적 개념의 시민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10년대의 성장기를 거쳐 1920년대에는 초기적 형태의 시민사회 역시 그 출현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의 강점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조선의 1910년대는 정치체제를 두고 각축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市民은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다.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상공업층이 계급분화를 주도하는 가운데 농민의 임노동자화, 빈농층과 무산계층의 도시 유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별 탈 없이 추진됐다면 도시와 농촌지역의 계급분화는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시민사회를 형성할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을 것이다. 실제로 계급분화가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극대화하는 제도와 법만들기가 불가능했고, 타계급과 투쟁, 협의, 조정하는 자치능력을 발휘할 공론장은 폐쇄됐으며, 국가권력을 창출하고 그에 대한 공적 책무와 시민적 윤리를 배양할 공간은 소멸됐다. 국가는 사라졌으며, 개인과 사회는 어떤 자율성도 발휘할 수 없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섰다. 그곳은 출구가 막힌 동굴과 같았다. 개인은 시민으로, 사회는 시민사회를 향해 서서히 발을 옮기고 있었지만, 시민됨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자율성이 박탈된 동굴이었다. ‘동굴 속의 시민’-근대 이행기를 경과한 조선의 개인과 사회를 기다리는 것은 불행히도 그런 어둡고 슬픈 공간이었다. 그것을 상상적 시민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想像國家속의 想像的市民, 이것이 식민지 시대가 강제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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