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8:10 (금)
사상의 탄력성을 회복하려면
사상의 탄력성을 회복하려면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문학
  • 승인 2014.10.06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문학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문학
내게는 나만의 ‘전향론’이라는 것이 있다. 전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사상을 바꾸어감’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는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가 그 사상을 버리는 행위를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것을 좀 더 일반화해 어떤 특정한 사상의 소유자가 자기 사상을 변모시켜 가는 뜻으로 사용해 보자.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본다. 전향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는 그것이 자기 정신 내부의 막을 수 없는 진화의 산물로서 나타나는 것인 한에서 전향은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벌레가 고치를 지었다 나비나 나방이 되듯이 사람의 정신은 일신우일신해 환골탈태하지 않고는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어렵다. 사람이 어른이 돼서도 어린 아이의 마음 그대로일 수 없듯이, 어른이 돼서도 사람의 정신은 부단히 바꿔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정신은 살아 있어도 그것은 이미 화석 같은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특히 정계, 학계를 보면 보수냐 진보냐를 묻고, 따지고, 가르고, 비난하는 일이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식의 진영 나누기, 편 가르기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날로 확산되고 있다. 이로부터 이득을 보는 일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같은 이념 과잉 사회에서 이는 미래의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숱한 일들에 보수냐 진보냐 하는 잣대를 들이미는 풍토는 무엇보다 우리들 사상과 정서의 고형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보수이고 저렇게 생각하면 진보라는 것인데, 과연 그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1980년대 말의 동구 사회주의 몰락, 뒤이은 팍스 아메리카나, 신자유주의 물결 같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보수나 진보라는 말이 표현하는 내용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으며, 지금도 그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변화의 물결 위에서 보수나 진보라는 말의 실체적 내용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이 말들의 의미나 실내용은 지금 급격한 해체 및 탈구축을 겪고 있으며, 그 재구성, 재구축의 의미는 시간이 오래 지난 다음에서나 다소 명확히 판별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자신이나 남을 보수 또는 진보로 규정하거나 낙인찍는 행위는 자기 자신도 남도 실체 불분명한 이름의 허울 속에 가둬 두는 일이나 다름없다. 분명 튼튼한 철책으로 둘러친 것 같지만 무엇으로 둘러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형화된 개념의 주박에 걸린 이들은 자신의 정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음을, 죄 없는 남을 형체 없는 철책 속에 투옥시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정신의 화석화는 부자유를 신념으로, 이념적 폭력을 자유의 실천으로 착각하도록 한다.

어떤 이들은, 특히 자신이 진보적이라 믿는 이들은 우리 사회가 하루 빨리 보수와 진보의 경쟁, 대결로 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미 그 뜻대로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무슨 이익과 유리가 있었던가. 자신을 보수적이라 믿는 이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진보라는 이름의 퇴행성 정신병자로 취급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원치 않는 상태라면 그것이 정말 중병인 것이다.

이 글에서도 나는 보수, 진보라는 말을 수없이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실체 불분명한 이 선전적, 선정적 어휘들로부터 우리들 정신의 자유를 되찾자 오자는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사상과 정서를 창조적으로 바꿔갈 수 있는, 생리적인 탄력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 맹목적인 반목과 증오의 아수라장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문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