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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인문학'의 가능성 또는 한계
'거리의 인문학'의 가능성 또는 한계
  •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4.10.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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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현대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펑유란(馮友蘭)은 중국철학사를 크게 子學時代와 經學時代로 구분했다.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과 학파를 형성한 시기가 자학시대이고, 선현이 남긴 경전을 공부하고 이를 발전시킨 시기가 경학시대라는 것이다. 그 구분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있지만, 이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와 漢代부터 淸末까지는 내용적으로 분명하게 나뉜다.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얘기하게 된 것은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진다. 펑유란은 이 시기를 ‘제자백가의 부활’이라고 부르고, 패러다임의 전환기였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학술지형이 크게 바뀌는 느낌이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대학보다는 재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들의 독창적인 주장을 담은 저작들이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官學의 시대에서 民間學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인 듯싶다. 최근 나온 책 중에서 얼핏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임건순, 서해문집, 2014), 『생각의 시대』(김용규, 2014),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황순종, 만권당, 2014) 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대학 밖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쓴 것으로, 언론의 주목과 함께 그 내용 역시 상당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출판사에서 이들의 책을 낸 이유도 대학의 연구자들이 제기하기 어려운 담대한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지형 변화는 예고된 것이었다. 현재 대학들의 업적 평가는 논문을 위주로, 그 기준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논문보다 시간과 품은 훨씬 많이 들고, 그 성과는 논문 한 편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취급되는 저서를 쓰는 교수는 드물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교수나 시간강사의 경우는 그 상황이 더 말할 것도 없다. 언제 올지 모르는 전임의 기회를 준비하느라 기준 논문 편수를 유지하다 보면, 저술 작업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학에 몸을 담고 있다 보면, 이런저런 학계의 인연과 관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대학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운 재야 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은 한국의 주류 사학계, 구체적으로는 서울대와 고려대의 역사학과 ‘師團’을 구체적인 실명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와 스에마쓰, 이나바 등의 식민사관 창도자들과 와세다대, 경성제국대 국사학과 등의 학연으로 엮인 이 ‘사단’의 굳건한 의리가 한국현대사 정립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 신랄하게 파헤친 이런 책을 대학의 연구자가 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말대로 이들 ‘사단’은 여전히 대학과 연구소들, 동북아연구재단 등의 기구와 조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재야 인문학자의 권리다.

“국가는 경찰과 군대로 대변되는 폭력을 독점한 존재로, 국민에게서 세금을 거둬갑니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거둬가지요. 그래서인지 가끔 국가가 깡패 같기도 합니다. 실제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가 돈을 갈취할 때 세금이란 말을 즐겨 쓰지요. 무정부주의자도 국가를 깡패라고 부릅니다. 정치학자도 국가에 깡패적 속성이 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지만 인정하는 사람이 많고요. 용산참사나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사례에서 국가는 깡패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곤 했지요. 또 언제 그때처럼 깡패가 되어 선량한 국민을 쥐어 팰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임건순이 그의 책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에서 한 말이다. 이런 솔직한 표현을 대학 교수가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은가.

거리의 인문학자가 늘어난 이면에는 대학의 구직란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일찌감치 본인의 진로를 대학이 아닌 시민사회로 결정한 학자들이 늘어났다는 현실적 아픔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새로운 제자백가의 시대가 한동안 유행할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가 ‘시민인문강좌’ 등의 관련 사업에 지원을 늘린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추세를 뒷받침하는 현실적 조건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거리의 인문학 붐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된 인물은 얼 쇼리스다. 그의 사후 최근 출간된 『인문학의 자유다』(박우정 옮김, 현암사, 2014)는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한 책이다. 그의 인문학 운동에서 주목할 점 중의 하나는 그가 청년들을 교육의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클레멘트 코스의 교육목적이 공동체 속에서 자유로운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이 그 교육의 중심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등장한 ‘폭식투쟁’이나 ‘서북청년단 재건’과 같은 사건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정신 상태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점에서 이 책은 거리의 인문학, 시민인문학 운동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대학의 틀을 벗어난 거리의 인문학자들이 많아지는 것이 좋은 현상일까. 그렇다고도 또 그렇지 않다고도 답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점은 하나 있다. 그 주장의 대담함과 함께 학문적 정확성 또한 갖춰져야 한다는 것. 이 점이 담보되지 않으면, 우리 시대의 인문학 붐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사그러들 위험이 있다. 공자가 일찍이 경계한 말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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