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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아실현이 국가발전의 목적될 때 국민은 행복하다
개인의 자아실현이 국가발전의 목적될 때 국민은 행복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9.26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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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동과학연구소·한국미래학회 학제간학술포럼 ‘발전과 행복’

제반 국가 발전의 목적은 모든 국민의 최대한의 자아실현이다. 그것이 넓은 뜻에서 국민의 행복조건이 된다. ‘발전’을부를 위한 경제발전으로만 여기는 게 문제다.

▲ 정범모 한국행동과학연구소 회장
난 19일(금)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아산정책연구원 강당에서 흥미로운 포럼이 진행됐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소장 이종승)과 한국미래학회(회장 김성호)가 ‘발전과 행복’을 주제로 함께 개최한 2014년 학제간 학술 포럼이 그것이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사회를 행복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보는 것으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심리적으로 고단한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아이러니를 진단하고자 했다. 1, 2부로 진행된 이날 포럼은 정범모 한국행동과학연구소 회장의 발제강연 「발전과 행복」을 비롯,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의 「기복 사상과 현대사회」, 이훈구 전 연세대 교수(심리학)의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김경동 카이스트 경영대학 초빙교수의 「사회의 발전과 행복-사회학적 성찰」,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전, 행복, 그리고 지속가능성」 등 4편의 발표가 이어졌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과)와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가 토론자로 참여했으며, 발표가 끝난 후 ‘자유토론’이 진행됐다. 다음은 이날 정범모 회장의 발제강연을 정리한 글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얼마 전에 영국 시사주간지의 한국 특파원인 영국인 저자 튜더(Tudor)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제로 인상적인 저작을 펴냈다. 책 제목은 『Korea-the Impossible Country』지만, 그 뜻은 ‘불가능을 이뤄낸 희귀한 나라’라는 뜻이다. 외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지식이 해박한 저자는 그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루뤄낸 기적적인 경제발전의 자취를 소상하게 기술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한국이 이러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 자신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한국은 개인당 소득 10위에 육박하면서도 한국인의 행복감 지수는 70위고, 경제 상위 24개국 중에서는 밑바닥인 23위이며, 자살률도 리투아니아와 같이 세계 제 1위고, 술 소비량도 세계 최상위급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한국은 그간의 성취를 자축하는 샴페인을 즐기는 마음의 여유와 더불어 부의 추구에만 골몰한 삶을 반성할 만한 때라고 결론지었다. 이 책이 한국어로도 번역됐는데, 한국어판에서는 책 제목을 원저자의 결론을 더 부각해서 아예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붙였다.


우리는 잘 살려고 즉 행복하려고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하지만 다시 깊이 성찰해야 할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발전’이란 무엇이냐라는 문제다. 경제발전이 GDP의 성장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정치발전이 1인 1투표의 민주주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면, 거기에 부수돼야 할 다른 여러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심리적 조건은 무엇인가. 둘째는 ‘행복’이란 무엇이며 그 원천적 조건은 무엇이냐라는 문제다. 셋째, 새롭게 등장하는 더 심각한 문제는,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부가 행복감과 별 관계가 없다면, 그 수준 이상에서도 부와 행복감이 아울러 같이 증진하게 하는 경제·경영·정치적 정책은 무엇이냐다.


첫째 문제 즉 발전에 대해 내가 종래 가지고 있던 간명한 답은 제반 국가발전의 목적은 모든 국민의 최대한의 자아실현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태어난 생리적·정서적·사회적·‘철학적’인 필요를 적정하게 충족하고 그 자질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목표다. 그리고 그것이 넓은 뜻에서 국민의 행복조건이 된다. 문제는 ‘발전’을 이런 넓은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좁게 부를 위한 경제발전으로만 여기는 데 있다.


둘째, 행복에 관한 나의 답은 건강, 화목한 인간관계, 善 행위, 보람 있는 일에 몰입하기로 요약할 수 있다.
어려운 문제는 셋째, 발전과 행복의 관계다. 과연 어느 수준 이상에서는 발전과 행복은 같이 성장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라면, 그 이상에서도 그 둘의 병진이 가능한 정치·경제적 방책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많은 성현들이 일러 주었듯이 행복은 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할 정신상태인가. 아마도 이런 문제는 경제학·경영학·정치학·심리학·철학 등 모든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계속 추구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예로 몇 가지 즉흥적인 단상을 다음에 적어본다.
첫째, 역시 부가 반드시 행복의 원천은 아니라고 한 옛날 성현들의 말은 옳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는 의식주 등 기본적인 생리적 필요를 충족한 후에는 그 행복 효능을 잃고, 대신 단란한 인간관계, 善 행위, 보람 있는 일에 몰입하는 삼매경이 더 행복 효능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만큼은 부가 행복 효능을 갖는 셈이다. 부자의 기부 행위가 그 예다.


둘째, 사람들은 믿을 데가 있어야 행복하다. 주변 사람들을 믿고 공무원을 믿고 상품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아무리 부자라도 불안하고 불행하다. 따라서 서로가 믿을 수 있고 속이지 않는 ‘사회적 신뢰’와 부정부패 없는 ‘사회적 투명성’이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 사람들은 시기심이 날 정도로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하면 넉넉하게 산다 해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그만큼 불행감을 느낀다. 따라서 가파른 경제적 불평등은 어떤 모양으로든 완화돼야 한다.
넷째,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며 즐기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감을 느낀다. 매일 하루 종일 일만 해야 한다면 피로와 불행감이 쌓인다. 따라서 생산성을 제고함으로써 작업시간을 줄이고 ‘어울림의 시간’을 늘여야 한다.


그러나 위 사회적 신뢰와 투명성 제고, 경제적 불평등, 생산성 향상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 여기 논의를 넘는 크나큰 문제다. 하지만 좀 비슷한 제안을 두 가지 첨가해 본다.
즉, 다섯째, ‘직장문화’를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직장이 직업활동만 하는 곳이 아니라, 넓은 뜻의 ‘문화생활’도 할 수 있는 곳, 서로 경쟁만 아니라 협동ㆍ화목도 할 수 있는 곳, 일만 아니라 자기 성장을 위한 ‘배움’의 기회도 있는 곳일 것이 요망된다. 그것이 도리어 생산성 향상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런 직장문화의 일환으로, 직장 탁아소 내지는 보육원의 운영을 제안할 수도 있다. 늘어나는 젊은 기혼 여성근로자들의 큰 스트레스의 원인인 육아에 관한 고민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하루 두세 번 잠깐 젖도 먹이고 놀아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근래 신체운동, 스포츠 활동이 몸의 건강증진만 아니라, 사고력 등 지적 활동을 활성화해 주고, 스트레스 해소, 불안증 완화, 우울증 해소, 주의집중력 증진, 각종 중독증 치유 등에도 효과가 탁월하다는 연구가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직장에서 직원들은 물론 CEO들도 땀을 살짝 흘릴 수 있는 오후 한 30분 정도의 에어로빅이나 한 1천미터 뛰기 등을 권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행복감 증진의 경지에서도 참고할 만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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