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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재된 것들’을 통해 圈域史를 넘어설 때
‘혼재된 것들’을 통해 圈域史를 넘어설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4.09.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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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모던 혼성: 동아시아의 근현대미술』 문정희 지음|한국미술연구소CAS|600쪽|40,000원


특히 모던 시대의 굴절된 아이덴티티가 혼란과 질곡을 통해 보여준 것들은 오늘날 개인, 국가, 사회가 더 이상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정체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아시아란 과연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 중심의 지역적 권역성만을 나타내는가라는 의문에 앞서 우리는 어느새 습관적인 편의에 따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지역적 명칭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라는 용어의 발생 속에는 일본이 제조한 정치 사회 이념이라는 분명한 역사가 존재하고, 그 발생은 ‘근대’의 시작과 맞물린 과거의 사실이 존재한다. 이 책은 한국, 중국, 대만과 일본의 근대미술을 통해 동아시아라는 맥락을 이용해 동양과 서양, 식민지배와 피지배, 전통과 개혁을 대비시켜 고찰한 연구 논문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저자인 필자는 동아시아의 근현대라는 역사적 관점을 ‘모던’과 ‘혼성’의 키워드로 정의하고, 나름의 연구 과정의 변화와 연유를 들어 각 주제로 고찰하고자 했다. 물론 근대미술을 포함한 사회, 문화 범주의 학문에서 식민주의나 근대성 담론에 빚을 졌지만, 굳이 후기식민주의나 탈근대성의 관점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됐다. 근대의 특성에서 꼭 살펴야할 미술제도의 상대화, 서열화된 경향들을 해체시켜 새로운 이념을 방법론으로 사용하지 않고서도 그 역사적 ‘사실’의 단면에서 쉽게 파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이 점이 필자에게 있어서 동아시아 권역의 미술이라는 시각이미지를 지리적 수평선상의 시간을 통해 공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접근성 높은 방법이기도 했던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에서 ‘모던’은 모더니즘을 지칭하는 예술사조를 뜻하지만 사회문화적 현상에서 볼 때 최신 감각을 형용하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해왔다. 동아시아 미술에서 ‘모던’한 요소는 바로 시각이미지 전반에 걸친 ‘패션’ 즉 ‘유행’이었던 모던 시대의 특징이 될 수 있다. ‘모던’이 지배한 동아시아 미술의 특성은 예술가들의 작품 외에도 교육과 전시 관련의 미술제도, 프로퍼갠더와 같은 정치 예술운동, 그리고 여성을 포함한 작가들의 모더니즘에 관한 여러 담론들을 통해 발견된다. 또한 모던이라는 역사적 특성은 그 성분을 고찰하면 할수록 더욱 ‘혼성’적인 형태가 내재된 사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요소가 모던 속에 숨겨져 있거나 혹은 모던과 달리 혼재된 탈모던한 이율배반적인 것으로도 생각한다.

숨겨져 있거나 혼재된 것
과거 근대 담론에서 일본이 구축한 동양이란 서양에 대항한 외부 요인에서 그 범위와 모습을 찾아 왔고, 이는 일본의 탈아시아 이데올로기가 식민지 한국과 대만의 지배를 정당화했던 식민주의 연구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벗어난 동아시아 미술에서 중국은 민족주의 전통과 혁신을 내세워 근대미술의 保國的 태도를 강조해왔다. 어쩌면 이는 동아시아를 권역에 두고 자국사로 점철시켜 나감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시간의 공통적 맥락을 민족주의 관점만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나는 공통의 중심축을 한 곳에 모아 편향적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해 서로 지닌 기본 사실이 혼재된 당위성을 좀 더 문제의 본질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서양에 대응한 동아시아 혹은 서양 충격으로 일어나 근대가 아닌 서로 다른 입장의 곤경과 부딪히는 최소화된 완충의 모던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동아시아의 근현대미술의 특징을 ‘모던(modern)’과 ‘혼성(hybrid)’이라는 형용사로써 시대상을 그려보고자 했기 때문에 명사인 ‘모더니티(modernity)’와 ‘혼성성(중국에서는 ‘혼잡성’으로 더 많이 사용, hybridity)’과 같은 용어를 피했다. 명사적 의미는 아무래도 그 성격을 결정하고 제한된 의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다. 근대를 초극하기 위한 동아시아 미술로서 ‘모던’은 물론 예술사조에서 종종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이지만, 나의 연구의 진척은 思潮와 달리 시각이미지가 지닌 직접적인 유행 현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라는 권역의 범위를 어느 정도 공통된 요인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서구 모던에 대해 일본에서 최신의 여성 헤어스타일인 짧은 머리라는 ‘모단(毛斷)’이라고 음역했고, 이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그대로 이식돼 유행했던 점, 그리고 중국에서도 ‘모덩(摩登)’으로 음역돼 널리 사용된 점 모두 동아시아의 공통 요인인 동시에 모던이 표출한 중층적인 이미지들로 그 파생 원류가 하나가 아닌 혼성된 모던 표상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가 대만 근대미술을 연구하게 된 일련의 경험은 행운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전환적 계기가 됐다. 예를 들면 대만 서양화가로 근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천청보(陳澄波, 1894~1947)가 대표적이다. 일본의 식민지 대만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상하이에서 관전과 전위미술 그룹 활동에 참여하면서 중국적인 경험과 대만적인 지방색을 아이덴티티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한 가장 혼성적인 인물이다. 당시 그는 식민지인으로서 일본 여권을 들고 상하이에 착륙했고, 그 곳에서 대만인으로서 중국 본토와 차별된 화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훗날 대만으로 귀국해 일본 패망 후 중국 국민당 정권 하에서 희생된 대만인이라는 것 역시 모던 화가의 혼성적 아이덴티티를 지닌다.

천청보의 미술세계와 비극적 궤적
이와 같은 사례에서 좀 더 개진할 수 있었던 분석은 인물의 혼성성 외에도 모던의 미술제도나 미술운동과 같은 신흥 기운의 혁신적 면모 등이었다. 특히 식민지 관전에서 일본인 심사원들의 활약은 식민주의의 일환이라는 기존의 연구 성과 외에도 그들 안에 존재한 모순과 권력 쟁탈이 동아시아를 무대로 드러난 사례로 분석할 수 있었다. 일본 화가들이 식민지 한국과 대만을 무대로 보여준 국가 이념과 모던의 혼성된 양식들이 존재했고, 또한 일본 관전에 공모하거나 재야 단체에 참여해 신흥 양식을 흡수한 한국과 대만, 그리고 중국의 일본 유학생들이 보여준 활동은 근대 초극의 숨은 인자를 배태한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는 모던 속에 숨겨진 혼성의 인자를 찾아나서는 작업으로서 오늘날 동아시아 미술의 모습을 추적하는 로드맵이기도 했다.


모던을 좀 더 큰 틀로 규정하고 이 안에 시대사조로서 모더니즘을 파악할 때, 중국의 현대미술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사실주의라는 국가적 아이덴티티가 압도적으로 표상화 됐다. 특히 마오쩌둥 시대의 여러 장르인 회화, 드라마 등에서 단일화된 듯 보여준 프로파갠더 경향의 반복적인 표상들은 서구에서 주목한 아방가르드 미술로 현대성을 부각하면서 차용과 의미의 중첩적 기능을 확대한 혼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시각적 표상들이 소비와 상업화라는 대중적 요구에 대한 하나의 아이콘이 돼 중국 컨템포라리 미술의 역사적 위상을 과시한다. 이 점 역시 동아시아 미술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 현상이며 아울러 모던 시대의 굴절된 아이덴티티가 혼란과 질곡을 통해 보여준 것들은 오늘날 개인, 국가, 사회가 더 이상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정체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문정희 (사)한국미술연구소 선임연구원
필자는 중국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만 타이난 예술대학 객좌교수를 지냈다. <미술사논단>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동아시아 미술의 근대와 근대성』 (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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