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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범아랍영화의 황금기’가 주는 교훈
짧았던 ‘범아랍영화의 황금기’가 주는 교훈
  • 박은지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4.09.02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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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22_ 지중해 영화의 가려진 얼굴

오늘날 미디어에 그려지는 아랍 국가의 이미지는 테러리즘, 전쟁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상승으로 요약되지만, 아랍의 영화들은 잃어버린 지중해에 대한 향수를 깨운다. 아랍의 땅은 시네필들에게 낯설지 않은 지역이다. 이국적인 풍광을 제공하는 촬영지로 명성 높았던 모로코의 예를 들어보자. 「카사블랑카(Casablanca)」의 연애담과 데이비드 린(David Lean)의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등 수많은 영화들이 이곳을 무대로 촬영됐다. 하지만 모로코인의 자기재현이 가능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현상은 아랍권 영화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아랍에서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적 분위기를 갖고 있던 것은 레바논과 이집트의 영화였다. 이 두 나라의 영화는 1950~60년대를 풍미한 범아랍영화(Pan-Arab cinema) 황금기의 중심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범아랍영화는 아랍 민족주의 시대에 유행하던 다국적 멜로드라마를 말한다. 다양한 아랍의 스타 배우와 감독들이 카이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등지의 로케이션 촬영으로 만드는 합작 영화였다. 어쩌면 레바논 내전과 남쪽 국경에서 이스라엘과의 대립으로 인해 레바논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그토록 서둘러 나라를 탈출하지 않았더라면, 범아랍영화는 황금기를 더 오래 구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세계 영화의 지형도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때 이집트의 카이로는 ‘아랍 영화의 헐리우드’로 통했다. 바야흐로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한 해 50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어 냈으며, 당시의 스타들은 2억에 달하는 아랍권 관객을 매혹시키면서 이집트 영화계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영화사가인 조르주 사둘(Georges Sadoul)은 “1942년부터 아랍 국가에서 미국이나 유럽영화들은 일주일 이상 간판을 못 버티는 반면에 이집트 영화의 개봉작들은 수개월간 상영됐다”라고 적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영화계 산업은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막대한 이윤을 남긴 산업이었다. 1952년 카이로는 세계 4위의 영화수출 도시였다.

▲ 「알제리 전쟁」이 촬영된 카스바(Kasbah)의 내부 풍경


이러한 이집트 영화의 성공 신화는 이집트 민족주의자 재벌이었던 탈라트 하릅(Talaat Harb)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가 소유한 미스르 은행(Misr bank)이 전폭적으로 투자해 부재나 다름없던 토대 위에 하나의 새로운 영화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른바 미스르 스튜디오(Misr Studio)는 수년간의 공사 기간, 영화인들의 유럽에서의 수련과 기술 연마 등을 거쳐서 1935년에 완성된 영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이집트 영화의 수작 「미이라(The Mummy)」를 비롯해 「십계(The Ten Commandments)」, 「시저와 클레오파트라(Caesar and Cleopatra)」 같은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미스르 스튜디오를 거쳤다.


당시 독립으로 미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아랍권은 이집트 영화들에 열광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역사와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랍 영화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해 중립이거나 적대적인 입장을 마치 오랜 앙금처럼 지녀왔다. 튀니지의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페리드 부게디르(Ferid Boughedir)는 다큐멘터리 「카메라 아랍(Cam´era Arabe)」에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벌인 1967년 전쟁에서의 패배는 “얼마 남지 않았던 아랍 지식인들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라고 증언했다.


한때 아랍의 헐리우드였던 이집트 영화는 1960년대 후반에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 시기에 유세프 샤힌(Youssef Chahine)은 이집트 국민감독이자 아랍 세계를 대표하는 감독이었다. 원래 샤힌은 잘 나가는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카이로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오마 샤리프를 발견하고는 세계적 스타로 길러낸 이집트 대중 영화계의 대부였다. 하지만 1967년 전쟁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그는 정치적 도발을 감행한다. 「참새(The Sparrow)」를 통해 이집트가 형제 국가인 팔레스타인을 지켜주지 못했음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집트의 다양한 군상이 역사적 전환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자전적인 대서사시 「알렉산드리아, 왜?(Alexandria, Why?)」는 묵직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1940년대 초반의 지중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전쟁 전야의 불안에 넘치면서도 살아 있는 맥박이 박동치는 도시로 그려낸다. 이 여정의 끝에는 “내 유년의 도시, 즉 무슬림, 기독교인 그리고 유대인에게 열려 있던 관용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기억이 도사리고 있다.


2008년 유세프 샤힌이 82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집트 영화계는 큰 별을 잃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해 “샤힌은 이집트에 뿌리를 두고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실제로 과감한 성적 묘사, 정치적 압력과 이슬람 과격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등 종종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영화세계는 시대적 유효성을 뛰어넘어 종교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이집트 영화의 유산이 드러나는 최근의 기념비적 작품은 「야쿠비얀 빌딩(The Yacoubian Building)」이다. 현재 카이로 시내에 있는 야쿠비얀 빌딩은 1930년대에 세워진 한때 호화로웠던 최고급 건물이다. 당시 정부 고위관리와 부유한 상공인의 거처였지만 1952년 군사혁명 후에는 군 장성과 장교 가족의 거주지가 됐고,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인해 건물 옥상엔 빈민들의 밀집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이 빌딩에는 이집트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하층을 구성하는 다양한 군상이 공존한다. 나이 먹은 난봉꾼이 여성편력에 빠져들고 마약 거래상이 정치인이 되어 국가를 사금고처럼 운영하는 권력자가 되는가 하면 가난한 소년이 테러리즘에 빠지는 이야기. 한마디로 「야쿠비얀 빌딩」은 아랍의 시민혁명을 이해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아랍의 영화는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미지의 영토이다. 페르시아권의 이란 영화와는 구별되는 아랍 영화는 국제영화제의 물살을 타고 신비감을 벗어내는 중이다. 이것은 영화가 더 넓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집트 영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서구화에 대한 하나의 답을 들려주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어떤 문명권의 영화도 영원히 암흑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는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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