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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 타고 찾아간 ‘사십리성’ 유허 … 起源을 향한 질문만 공중에 나부껴
경운기 타고 찾아간 ‘사십리성’ 유허 … 起源을 향한 질문만 공중에 나부껴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9.0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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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0. 焉耆의 비밀(1) ‘언기’의 말뿌리를 찾아서

▲ 사십리성 가는 길의 전원 풍경.사진 권오형

우여곡절 끝에 사다리를 밟고 해자를 건너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로 야트막해진 성벽 위에 올랐다.
몇 개의 돌덩이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방의 둘레는 사십 리가 채 안 돼 보였다. 주변도 온통 망망한 초원이었다. 설마
여기가 고대 언기 왕국의 도읍처는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神은 있다, 없다? ―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 않으나 없지도 않다.”―龍樹(150?~250?. 中觀을 주창한 인도의 승려. 용수는 산스크리트 본명 N­ag­arjuna의 의역)

무심결에 넘어가는 일들이 많다. ‘Greece’를 우리는 희랍 혹은 그리스라고 한다. 현지인들은 ‘Hellas’ 혹은 ‘Ellada’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Hellas’라면 그 주민을 가리키는 인명은 ‘Hellenes’다. 때문에 그리스의 공식 명칭은 ‘The Hellenic Republic’이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궁금하다. 왜일까? 우선 ‘Greece’는 영어 명칭이다. 이오니아해에 면한 헬라스의 한 지역 명칭에 불과했던 ‘그라이코스(Graicos)’를 듣고 로마인들이 차용한 라틴 명칭 Graecia(the land of the Greeks라는 의미)에서 변모한 것이다. 정확히는 이오니아 해안의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라틴어 ‘Graeci’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자어 희랍(希臘)은 기실 ‘Hellas’에 대한 중국인들의 음차어다. 그것을 빌려 우리는 우리식으로 희랍으로 읽은 것이다. 그리스 문명을 가리켜 왜 헬레니즘(Hellenism)이라 하는지 이제 이해가 될 법하다.

잠깐 신화 속 이야기를 듣고 넘어가자. 호머(Homer)와 거의 동시대인 기원전 750~650년경에 활동한 희랍 시인 헤씨오드(Hesiod)는 자신의 저술 『여인 목록(Catalogue of Women)』에서 판도라와 제우스의 아들 중에 그라에쿠스(Graecus)라는 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제우스에게는 부인이 많고 판도라에게도 만만찮게 남편(?)이 많았음을 기억하자. 그라에쿠스 이 양반이 헬레네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고, 그의 동생 라티누스(Latinus)는 라틴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줬다는 것이다. 한편 6세기경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문법학자로 활약한 스테파누스 비잔티우스(Stephanus Byzantius)는 『윤리(Ethnica)』라는 이름의 고대 그리스와 관련된 지리, 신화,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지리서에서 헬레네인들이 테살루스(Thessalus)의 아들 그라에쿠스(Graecus)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을 그라에씨(Graeci)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영국도 ‘Britain’이라고 하는가 하면, ‘England’라는 명칭도 있다. 왜일까? 전자는 로마인들이 식민지 영국을 가리키던 명칭 ‘Breton’에서 파생된 말이고, 후자는 나중에 영국을 점령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Angles’와 ‘land’가 합쳐져 만들어진 명칭이다. 이런 사정과는 상관없이 중국인들이 남의 나라 ‘England’를 英國이라 한 건 Eng-의 소리 英과 land의 뜻 國을 합친 결과다. 미국을 우리는 美國이라 표기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고집스레 米國이라 적는다. 결코 쌀이 많이 나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다. America에서의 Ame-를 米로 적고 그 다음에 나라를 뜻하는 國을 붙인 것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전차군단 獨逸을 그들은 德國이라 한다. ‘Deuchland’의 Deu-의 소리로 德을 취하고 거기에 나라를 의미하는 國을 척하니 붙인 셈이다. 완전 자기네 스타일인 것이다.


그런 중국인들은 자랑스런 대한민국 사람을 조선족으로, 러시아 등 구 소련권 나라에서는 카레이스키(고려인)로, 일본인들은 강고쿠진(한국인)으로, 자주는 경멸적 의미를 담아 조센징으로 부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일러 韓國人이라고 부른다. 남이 부르는 민족 명칭을 엑소님(exoethnonym)이라 하고, 내부의 사람이 자신을 일컫는 명칭을 엔도님(endoethnonym)이라고 한다.


우리가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듯, 중국의 역사는 그 이상으로 깊다. 정권이 바뀌며 나라 이름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스스로 黃帝의 후손, 漢族이라고 믿고 그렇게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과 접촉하거나 소문을 들은 외부인들은 이들을 달리 불렀다. 기록상 최초의 타칭은 세레스(seres)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페르시아 너머 동방의 중국인들을 그렇게 불렀다.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들을 인용한 A.헤르만(Albert Herrmann)에 따르면, 총령(파미르) 이동의 카시가르(Kashghar: 고대 범어로는 Kacha)에서 실크로드는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이른바 천산남로(사막북로)와 사막남로다. 카시가르에서 천산남로를 따라 북으로 첫 번째 도시가 ‘Issedon Scythica’ 즉 쿠차다.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들은 카시가르에서 시작한 실크로드가 쿠차를 지나 Damna(카라샤르 혹은 언기), Issedon Serica(롭 호수 혹은 이 호수를 기반으로 한 고대왕국 누란을 가리킴), Daxata(옥문관) 순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곤륜산맥 북쪽 기슭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로 난 사막남로를 따라서는 카시가르에서 길이 시작돼 야르칸드를 거쳐 호탄, 니야, 미란, 그리고 롭 호수의 누란왕국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두 길은 돈황에서 만난다. 그리스, 로마의 지리학자들은 이곳을 ‘Throana’라고 했다. 돈황에서 길은 이어져 Drosakhe(酒泉?), Thogara(張掖?)를 거쳐 Sera Metropolis 長安(오늘날의 西安)과 Saraga 혹은 Thinae로 불린 하남 洛陽에까지 이른다. 놀라운 일이다. 고대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어디서 이런 정보들을 얻은 것일까? 오늘 인문학기행의 목적지는 쿠차에서 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고대 도시국가 언기(焉耆)다. 키질 천불동(Kyzyl은 ‘붉은(색)’이라는 뜻의 투르크어다) 등 불교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쿠차 인근의 석굴 사원에 대한 얘기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으로 유명한 옛 高昌國 (오늘날의 투르판)과 樓蘭왕국(오늘날의 샨샨)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협곡 위에 조성된 베제클리크(Bezeq-liq, 柏孜克里) 千佛洞 석굴을 살피며 언급하기로 한다. 언기 동방의 이 두 왕국은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동쪽에 있었다. 위구르어 ‘베제클리크(Bezeqliq or Bezeklik)’의 의미는 ‘a place with paintings’ 혹은 ‘a beautifully decorated place’라고 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단단위리크(Dandanyi-liq, ‘상아의 거리’라는 뜻), 파지리크(Pazy-ryk), 알말리크(Alma-lyk, ‘사과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우즈벡어로는 Olma-liq로 표기)와 같은 명칭에서 보듯 ‘-lik(-lyk or -liq or -lig(h) or -ryk or -lec)’가 장소를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다.


언기는 10세기경부터 파미르 이동 서역 타림분지의 오아시스의 주인이 된 위구르인들에 의해 카라샤르(Qarashar) 즉 ‘검은 도시(黑城)’라는 이름으로 개명돼 불렸다. 언기라는 한자어 명칭은 무엇이며 카라샤르로 바뀐 건 왜일까?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언기왕의 姓은 ‘龍’이었다. 한족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성씨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기는 이웃국가 쿠차와 친해 서돌궐과 손을 잡고 644년에는 조공을 거부하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오늘의 인문학기행에서는 주로 이런 nomenclature(命名法)를 살펴보려 한다.


▲ 회족 식당의 콩요리와 생선요리.
불볕더위의 진수를 경험한 투르판 여정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로 선택한 곳이 언기였다. 여기에 四十里城 유적이 있다 해서다. 이 성이 사실은 언기국의 도성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폐허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되짚어보기 위함이었다. 가는 길에 내륙해 보스텅(博斯) 호수를 찾았다. 중국 최대의 담수호로 수역 면적은 1천40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해발 고도 1천48m, 수심은 평균 8m. 2007년에 내륙어항 건설을 시작해 붕어나 새우, 진주조개, 농어 등이 풍부하다. 여름철 이곳 진샤탄(金沙灘) 해수욕장은 신장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서지가 된다. 옛사람들의 기록대로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인지 호숫가 식당은 온통 물고기 요리 천지였다. 보트를 타고 드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재미는 지프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재미 못지않았다.


남쪽으로 내려가 철옹성 鐵門關을 가려했으나 그러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내려가 샨샨(누란)을 지나 서역남로의 길을 택해야 했고, 그러면 다음 목적지인 쿠차로 가는 길이 어려워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누란 유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볼품이 없는데도 중국당국이 입장료만 무척 비싸게 받는다고 한 점도 누란답사를 과감하게 포기하게 만든 요인이다. 사람은 돈 앞에 약하다.


언기회족자치현은 현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 바인궈러몽골자치주 북부에 위치한 자치현이다. 이곳이 漢나라 때 언기(焉耆)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오이(烏夷), 당나라 때는 아기니(阿耆尼), 宋元대에는 카라샤르(喀喇沙爾)로 불렸다. 한나라 때 서역 36국 중의 하나였던 언기는 국세가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았다. 현장의 『大唐西域記』는 언기를 이렇게 말한다. “국방에 유리한 요새지요, 관개가 발달해 보리, 기장, 대추, 포도, 배, 사과가 풍성한 농산지요, 가람(사찰)이 10 여 곳에 승려가 3천이 넘는 불교의 본산이다.”


그러나 9세기 후반 이후 몽골 초원의 지배자 자리를 키르기즈에게 내주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한 위구르인들 때문에 오늘날 이곳은 현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 바인궈러몽골자치주 북부에 위치한 언기회족자치현이 됐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의 집단거주지역일 뿐 이렇다 할 역사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있지 않다. 단 하나 사십리성 유허가 외롭게 존재한다. 우리 일행은 어떻게든 이곳을 가야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바쁜 일정 속에 사십리성 탐사를 필생의 과업이나 되는 것처럼 포함시켰다.


언기 시내에서 만난 주민들은 사십리성을 알지 못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기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 물었다. 마침내 어딘지 알 것 같다는 회족 젊은이를 만났다. 자기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곳 부근이라고 했다. 한참을 가야한다고 했다. 젊은이를 버스에 동승시키고 일단 떠났다. 전형적인 농촌지역 도로변에 일단 버스를 세웠다. 젊은이의 도움으로 마을 경운기를 빌렸다. 경작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얼마를 갔는지 모른다. 경운기가 비좁아 불편하고 쉼 없이 덜컹거려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유쾌했다. 이윽고 낯설지만 드넓은 초지에 도착했다. 집이 한 채 있었고 예상 밖의 이방인 손님들에 놀라 휘둥그레 한 눈길로 집안에서 남자들과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사십리성터가 맞다고 했다. 다 허물어진 성곽터 앞에 현 당국이 세운 사각돌에도 그렇게 새겨있었다. 문제는 주변을 에워싼 개울이었다. 과거에는 垓字였는지 모른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을 말한다. 영어로는 ‘moat’으로 발음이 얄궂게도 우리말 ‘못’과 닮았다. 문제는 이 개울 같은 물길이 도약해 건너가기엔 너무 폭이 넓었다는 점이었다. 물속으로 몸을 던지지 않고는 건너 갈 방법이 없었다. 망설이고 있는 중에 집주인 남자가 사다리를 찾아들고 나왔다. 역시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 안타깝게도 해자폭에 비해 사다리가 짧았다. 가이드, 회족 젊은이, 경운기 주인, 현지 주민이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거리를 가늠하며 사다리를 물가 양쪽으로 걸쳐놓으려 무진 애를 썼다. 모기가 복병이었다. 살다 살다 벌떼 같은 모기는 처음이었다. 머리와 팔다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제 자리 뛰기를 해도 모기는 포기할 줄 몰랐다. 그래도 사다리는 걸쳐야 했다. 수차례의 시도 끝에 마침내 좁은 수로를 발견하고 거기 사다리를 올려놓았다. 그 기쁨에 모기에게 어느 정도 헌혈하는 선행은 감수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우여곡절 끝에 사다리를 밟고 해자를 건너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로 야트막해진 성벽 위에 올랐다. 몇 개의 돌덩이 외에 그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방의 둘레는 사십 리가 채 안 돼 보였다. 주변도 온통 망망한 초원이었다. 설마 여기가 고대 언기 왕국의 도읍처는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언기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이 말은 어느 종족의 말일까? 먼저 친한 이웃국가 쿠차의 王姓을 살펴본다.
隋나라 말 각처에서 군웅들이 일어날 때 당고조 李淵은 아들 李世民과 함께 太原에서 거병해 617년 장안을 점령한 뒤 楊侑를 恭帝로 세웠다가, 이듬해인 618년 공제를 폐위시키고 양위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唐왕조를 세웠다. 이때 수양제에게 이미 충성 맹세를 했던 쿠차왕 소벌발결(蘇伐勃)이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소벌발결이라는 이상한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Suvarna Pushpa’의 음차어로 그 뜻은 ‘金花(golden flower)라고 한다. L´evi(1913: 319~321)는 쿠차 부근에서 발견된 木簡文書에 Swarna-puspa로 나타난 이 이름을 쿠차어(Tokharian B)라고 보았다. 의미상으로는 현장의 『大唐西域記』 卷1에 “쿠차왕의 號는 金花이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소벌발결이 죽자 아들 소벌첩(蘇伐疊: 쿠차어로 Swarna-tep, 산스크리트어는 ‘Suvarna Deva’의 음차어로 의미는 ‘황금의 神(the Golden God)’)이 뒤를 이었는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이 왕이 高昌國王 국문태(麴文泰)처럼 구법길에 이곳을 지나던 현장을 환대한 인물이다(630년). 이름으로 볼 때 이 부자의 성은 Swarna로 황금가문 출신이다. 혈통상으로는 고인도계 인종이라는 의심이 든다. 지배계층의 이름에 사용된 언어가 산스크리트어의 지역 방언이라고 여겨지는 쿠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태종의 명으로 지어진 『隋書』에 “쿠차(龜玆)왕의 성은 白이고 字는 소니질(蘇尼)”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白이라는 성은 전진왕 부견(堅)의 명으로 서역을 征討한 族 출신 呂光(후일의 後凉 태조)이 쿠차왕으로 임명한 인물의 성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쿠차의 왕들의 姓은 인도계 swarna이고 이는 ‘金氏’를 뜻하기 때문에 ‘白’과는 차이가 있다. 唐朝가 왕성을 왜 ‘白’이라고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松田壽男은 소니질이 서돌궐 十姓 가운데 하나인 鼠尼施와 상통하며, 이는 언기의 왕위를 突騎施 출신이 차지했던 것처럼, 鼠尼施 출신이 쿠차의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필자의 생각은 4세기 후반까지는 백씨가 왕권을 잡고 있다가 어느 시점에, 적어도 7세기 초반에는 蘇伐氏 즉 Swarna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쿠차의 지배집단이 인도계였듯, 언기 역시 그러했을까? 아니면 돌궐계였을까? 그것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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