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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方韓, 그리고 진정한 '대박'
교황 方韓, 그리고 진정한 '대박'
  •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 승인 2014.08.2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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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_우리는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나 윤 일병 사건 등으로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가운데 교황의 방문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얼마나 일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교황이 던지고 간 메시지는 무한경쟁 속에 서로를 학대하면서 지쳐가는 우리에게 뭔가 참신한 충격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124위 시복 미사에는 새벽 3시부터 봉사자와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안전 바리케이트 안에만 20만명이 모였다. 나는 우연히 이 미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이 시복 미사는 한국 천주교의 한 계기를 알리는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해 광화문 시복미사를 통해서 福者로 추앙된 124위의 순교자들은 정조 시절 신해박해(1791)에서 고종 시절 병인박해(1866~1888)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에 걸친 천주교 순교 역사를 포괄한다. 초기 순교자에 속하는 윤지충은 1791년 참수 당했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 군문효수 당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초기 한국 천주교는 로마 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서보다는 자생적으로 학습에 의해서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신앙의 틀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에 관해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설에서부터 북경을 오가던 사신단에 의해 책 등이 전해졌다는 설 등이 있다. 당시 중국의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를 통해서 천주교 교리가 학습됐다는 것은 이미 폭넓게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중국인 선비와 서양인 선비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가톨릭의 교리를 알리고 있다. 동양의 고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중국인과 성서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서양인 사이의 대화는 동서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빛이 바래지 않은 고전에 속할 것이다.

윤지충의 죽음도 부모에 대한 제사를 소홀히 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 문화와 조선 문화 사이의 경계의 갈등이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100여년간의 순교의 역사는 결국 사회문화적 충돌의 국면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외부로부터의 어떤 사상적 종교적 충격 만이 아니다. 조광의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2010)에 따르면 조선후기 혼란한 시기에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이상적인 해상세력이나 정치적 신세계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大舶’이라고 불리던 큰 배의 도착에 대한 조선의 신민들의 기대는 복합적인 사회갈등의 해소를 바라는 열망을 투영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군함을 타고 들어왔던 것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조선후기에 천주교가 폭넓게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은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자생적 조건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의 지배계층은 이들에 대해 강한 탄압을 시도했고, 이번 복자로 추앙된 이외에도 거의 8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 시복미사 당일에 주최즉에서 나눠준 자료에 따르면 이들이 당한 형벌은 참수가 가장 많고 장사, 옥사, 능지처참, 교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나이는 20대에서 60대까지 고루 퍼져있고, 대부분 이름이 확인되지만 최, 송, 이, 오, 장 등과 같이 성만 확인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름도 성도 확인되지 않는 사람은 몇 십배 더 많을 것이다. 지역도 한양, 경상, 전라, 충청, 경기, 강원 등 전국에 걸쳐있다.

그러나 이 또한 반쪽 자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교황방문기간 중에도 미사일 실험발사를 계속하던 북한의 평양과 함흥이 과거 한국 가톨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돼 온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이 그랬던 것처럼 초기 교회는 순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초기 종교공동체는 비교적 건강하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이다. 한국 천주교도 이러한 점에서 초기 교회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 같다. 이는 종종 보수적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유럽의 가톨릭과 다른 강점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말과 태도에는 모순이 많은 사회에 대한 경험이 녹아있는 듯했다.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교황이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한국인들의 호응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가 오늘 우리가 당면한 사회갈등을 치유하는 실질적 계기가 된다면 과거 천주교 순교자들의 희생은 더욱 값진 것이 될 것이다. 진정한 대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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