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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과거, 그 영욕의 흔적 … 어쩌랴! 영광은 영원하지 않다네
잃어버린 과거, 그 영욕의 흔적 … 어쩌랴! 영광은 영원하지 않다네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8.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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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8. 불교왕국 쿠차(3) 세 가지 이야기 ②탁발 여인의 운명과 수바시 사원의 흥망

▲ ‘잃어버린 과거’ 쿠차의 한 들녘에서 나그네를 향해 포즈를 취해준 이들에게서 문득 향기가 묻어났다.사진 권오형

“용서는 과거를 바꾸지는 못한다. 미래를 밝힐 수는 있다.”
― 폴 보이저

초복 지나 날이 더워지니 수컷 매미들이 극성스레 울어댄다. 7년을 굼벵이로 살다 7일의 수명을 보장 받고 그동안 짝짓기를 위한 필사적이고도 절절한 울음이라고 한다. 생이 본디 덧없거늘, 이럴 때 생의 의미를 되짚을 겸 불교왕국 쿠차를 포함한 실크로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을 듯하다. 다행히 여름 실크로드 여행을 위해 국적기가 인천-우루무치 간 직항노선을 개설해 놓았다. 더운 건 견뎌야 한다. 살면서 견딜 일이 더위뿐이랴! 고대로의 여행을 결행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몇 년 전 지인들과 함께 한 여정을 소개한다.


지난 글에서는 오손국 곤미(王) 옹귀미에게 시집을 갔다 일부종사를 못하고 유목민의 야릇한 풍속에 따라 남편을 세 번이나 바꾼 비련의 한나라 공주와 후일 쿠차 왕비가 된 그 공주의 딸의 운명을 살펴봤다. 인간에게만 영욕과 부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도 흥기와 쇠락이 있고, 예술과 문화도 부침과 변전이 있다. 한 때 玉의 종족 굴지가 지배하던 쿠차가 4세기 후반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서역정벌군 장수 여광에 의해 무릎을 꿇었음을 안다. 그리고 그가 내세운 백씨에 의해 왕조가 바뀌었음도 안다. 이렇듯 세상사는 변화무쌍하다. 불교왕국 쿠차가 오늘날은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의 땅이 된 것도 나름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다. 쿠차 동북방 23km 지점의 고대 유적 수바시 불교사원 유허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三法印이란 것이 있다. 근본불교의 핵심 교의인 삼법인은 팔리어로 tilakkhaa라 하는데 ‘(존재의) 세 가지 특성(three marks of existence)’이란 의미다. 왜 法印인가. 법인은 글자적 의미로는 ‘법의 인장이라는 뜻인데 “법인이 찍혀있으면 진짜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다”라고 할 정도로 불교 교리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존재의 세 가지 주요한 특성인 삼법인은 무엇일까. 一切皆苦(Dukkha), 諸行無常(Anicca), 諸法無我(Anatta)를 이름이다. 간단히 苦와 無常과 無我라고도 한다. 후일 일체개고를 涅槃寂靜으로 대체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는 애초의 삼법인에 열반적정을 더해 四法印이라고도 했다. 그렇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의 운명에 놓여있다. 또한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사랑도, 젊음도, 우정도. 고정된 실체도 없다. 없는데 내가 있다, 명예도 있다 하니 병폐다. 苦가 생기는 까닭이며, 지혜 즉 반야가 필요한 대목이다. 참다운 보리(bodhi: 깨달음)를 통해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열반적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이다. 이것이 먼저 깨달은 자 고타마 붓다의 기본 가르침 삼법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쿠차왕에게 시집 간 오손 공주가 있는가 하면 이런 경우도 있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 휘하에 있던 장군 李陵이 흉노에게 항복하고 낯설고 물 설은 흉노 땅에 살기로 한다. 흉노선우는 그를 높이 사 그에게 자신의 딸을 준다. 託跋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탁발은 /tabu/와 비슷한 소리로 불렸을 것이다. 사하(Sakha)어에 남아있듯 ‘순록(馴鹿)’이라는 뜻이다. 부리야트(Buryat) 말로는 ‘사하’가 ‘순록’이다. 아무려나 피가 다른 두 남녀 이릉과 탁발이 혼인을 하고 이 둘 사이에 자식이 생겼다.


오랑캐(胡)의 습속에 자식은 어미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한 장군 이릉과 탁발 여인 사이의 후손들은 그 성이 탁발이라고 사서는 전한다. 처음부터 선비계열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후일 우문, 모용, 단, 독발 등과 함께 선비제국을 구성한 주요 부족의 시원이다. 그리고 이들이 세운 北魏정권 때문에 당시의 외부인들이 자신들이 접한 중국인을 가리켜 타브가치(tabugach)로 부르게 된 계기다. 북위는 탁발(선비)이 세운 나라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온 사람들에게 있어 당시의 중국 지배세력은 탁발인 즉 타브가치였다.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투바(Tuva)공화국 명칭이 바로 탁발에서 비롯됐다.


『宋書』 권95 列傳 제55 삭로(索虜)의 기록이 탁발선비의 族源을 밝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삭로는 삭두로, 위로(魏虜) 등으로 기록돼 있는데 다 북위를 수립한 탁발선비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삭두로(索頭虜)의 성은 탁발씨(託跋氏)인데 그 선조는 漢나라 장수 이릉의 후예다.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매, (흉노에는) 수백수천종이 있으며 각기 자립해 명칭을 지니고 있는 바, 삭두 또한 그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나는 손이 귀한 집 증조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할머니께서는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옛이야기는 적절한 시점에 인생의 교훈을 준다. 요즘 문화의 주요 컨셉이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다. 이릉 얘기를 좀 더 하고자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서는 양과 말, 그리고 낙타 싸움을 시키고 돈을 거는 남자들의 오락이 있었나 보다. 놀다가 마음이 편치 않으면 사람들은 사원을 찾아 불상과 불탑에 예를 올리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나라의 장수로 북방의 흉노에게 투항한 이릉이란 인물은 어떤 자인가. 또 무슨 사연으로 조국을 버리고 야만의 민족으로 치부하던 흉노에 몸을 맡겼을까. 5호16국 시대. 풀잎 같은 존재인 민초들의 고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풍운아들이 야욕을 드러내며 중원과 그 북쪽 초원을 뒤흔들던 시절. 그 난세를 평정한 세력이 바로 탁발씨가 주축이 된 유목정권이 북위다. 그리고 탁발씨의 조상은 한나라 장군 이릉과 흉노 여인의 후손이다. 탁발과 흉노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사기』「흉노열전」 제50은 이릉의 흉노 투항 사건을 전후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 이듬해(漢 武帝 天漢 2년. 기원전 99년) 한나라에서는 이사장군(이광리)를 시켜 삼만 기를 거느리고 주천에서 나가 천산(天山)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만여 인을 얻어 돌아왔다. 흉노가 이사장군을 포위하니 탈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나라 군대는 열에 여섯 일곱을 잃었다. 한나라에서는 다시 인우장군 (공손)오를 시켜 서하(西河)에서 나가 강노도위(彊弩都尉)와 탁야산(涿涂山)에서 만났으나 얻은 바가 없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 ?~기원전 74년)을 시켜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북쪽으로 일천 여리를 나아가 선우와 만나 전투를 벌여 (이)릉이 (흉노병) 만여 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했다. (그러나) 병력과 식량이 다 떨어져 (포위를) 풀고 돌아오려고 하자 흉노 선우(單于)가 (이)릉을 포위하니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고 그의 병사가 다 항복하니 돌아올 수 있었던 자가 겨우 4백 명이었다. 선우는 이에 (이)릉을 장하다 생각해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右校王에 봉했다.” 이랬다. 위에서 보는 대로 한나라 장수 이릉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흉노에 투항해 흉노인 틈에서 산 인물이다. 한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배반자다. 그런 그가 위기 상황에서 선택한 삶의 방식은 선인가 악인가? 그런 판단과는 별개로 세상에는 이렇듯 뜻밖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 수바시 불교 사원 유적지 출토 사리함사진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SariraCasket.jpg
사마천의 『사기』 권109 「李將軍列傳」에 의하면 이릉은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병사 8백기를 이끌고 흉노에 쳐들어가 2천 리를 들어가 지형을 살피고 돌아와 기도위(騎都尉)가 됐다. 하지만 5천 명의 보병으로 흉노를 공격하다가 잡히고 말았다. 그 이후 가족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하자 그만 흉노에 투항하게 됐다. 이런 그의 입장을 옹호하다가 사마천은 치욕적인 宮刑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리고 역작 『사기』를 남긴다. 나중에 太史公이란 벼슬을 얻었지만, 그것이 거세의 아픔을 보상하기에 족했을까?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필경 오늘날의 흥안령(興安嶺) 일대에서 순록 유목 생활을 하다 장성 북방 대동지역까지 진출한 탁발선비는 4세기 중엽이 돼 북중국의 지배자가 된다. 북위를 건국한 탁발섭규(拓跋涉珪) 도무제(道武帝)의 황당한 죽음 또한 무상한 인생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萬人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開(字涉珪)의 愛妾이 開의 아들 河王과 私通을 하니 일이 발각될까 두려운 마음에 開를 죽일 마음을 품고 開가 밤에 홀로 있는 틈을 타 그를 살해했다. 이때가 安帝 義熙 五年. 開의 次子 齊王 嗣字木末이 河王을 잡아놓고 「人生所重者父,云何反逆。」라며 호통을 치고 자살을 명했다. 嗣가 뒤를 이어 위에 오르고, 開에게 道武皇帝란 諡號를 내리다.”


참 딱한 죽음이다. 어렵게 나라를 세웠으나 자신의 아들과 바람난 애첩에 의해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죽는다.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탐욕을 보자. 그 무상함을 보자. 혜비 무씨가 죽고 그녀와 미모가 흡사한 며느리인 자식(18황자 이모)의 부인(당시 22세)을 아내(첩인 귀비)로 삼은 당 현종이 있는가 하면(둘의 나이 차는 무려 35살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색정에 눈이 멀어 아버지의 여자와 놀아난 자식과 남편의 아들과 바람이 나 급기야 남편을 살해한 모진 여자도 있다. 이에 반해 낯선 이방인 이릉을 남편으로 받아들인 여인도 있다. 그리고 그녀의 順命 혹은 현명한 선택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역사는 말한다. 사물의 명운도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고대 쿠차의 선주민은 쿠차어 혹은 토하리언(Tocharaian) B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문자를 인도에서 취했다고도 한다. 이로 미루어 이들은 코카소이드(Caucasoid)계 혹은 인도-이란 계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손이 그러했듯 카시가르와 이곳 쿠차인들도 푸른 눈의 소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이 우리 동요 「구슬비」의 노랫말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에서도 보이는 것 같은 ‘옥구슬’의 종족 屈支種이었을 것이다.


諸行은 無常하다 했은즉, 때가 돼 4세기 후반 경 굴지집단은 白氏王家에게 지배권을 넘겨준다. 권력은 허망하다. 남북조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白氏 정권하에서 번성하던 쿠차는 또 6세기 말부터 천산 북방 율두즈 계곡에 근거를 둔 서돌궐의 위협을 받는다. 얼마 후 서돌궐을 제압한 당나라가 진출해서 658년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한다. 그 뒤 계속되는 토번(吐蕃)과 돌기시(突騎施)의 압력 속에 쿠차인들은 사는 게 고난의 연속임을 실감한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佛法을 믿었다. 멀리까지 소문이 날만큼 쿠차의 예술을 꽃 피웠다.
『新唐書』 「西域傳)」 구지의 습속에 대한 기록이 이채롭다. 여행은 이렇듯 다른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가무와 음악이 능하며 글을 옆으로 쓰고 불법[浮圖法]을 소중하게 여긴다. 자식을 낳으면 나무로 머리를 눌러놓는다. 풍속에 따르면 정수리까지 머리를 가지런히 삭발하는데 오로지 군주만이 머리를 치지 않는다. (왕의)성은 백씨(白氏)이고 이라로성(伊邏盧城)에 거주한다. 북쪽으로는 아갈전산(阿田山: ‘白山’이라는 의미의 Aq Tag 음역)이 솟아 있는데 백산(白山)이라고도 부르며 항상 불이 있다. 왕은 머리에 금모(錦冒)를 쓰고 금포(錦袍)와 보대(寶帶)를 착용한다.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일주일 동안 양, 말, 낙타 싸움을 시키고 그 승부를 관찰하여 이듬해의 풍흉을 점친다. 총령 이동 지방의 풍속은 음란함이 넘쳐나고, 구자와 우전에는 여사(女肆: 女市 혹은 妓院)가 있어 그곳에서 매음이 이뤄진다.”


불교왕국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 남자들의 객고를 푸는 홍등가가 존재했던가 보다. 투견과 투계, 투우가 우리네 풍속이라면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서는 양과 말, 그리고 낙타 싸움을 시키고 돈을 거는 남자들의 오락이 있었나 보다. 이렇게 놀다가 마음이 편치 않으면 사람들은 사원을 찾아 불상과 불탑에 예를 올리고 불순하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대표적 불교 사원이 수바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터전만 넓을 뿐 볼품이 없다. 천산 자락 악 타그(Aq Tag: 白山)를 배경으로 쿠차강 양편에 자리한 위치, 허물어진 수많은 불탑과 사원들을 볼 때 과거의 위세가 대단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쩌랴! 불교의 가르침대로 영광은 영원하지 않다.


수바시 불교 사원 유허는 쿠차시 동북방 23km 지점의 잃어버린 과거다. 여기서 발견된 6~7세기 사리함을 보면 당시 토착인 남성들이 긴 모직 튜닉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여인의 미이라인 일명 ‘수바시의 무녀(Witch of Subashi)’야말로 이 지역 고고학 발굴의 주요 성과다. 기원 1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사원은 당나라의 고승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는 도중 이곳의 장엄함에 반해 2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절정기 때는 1만 명에 이르는 승려가 있었으며, 중국 내륙에서 많은 僧徒들이 수행을 하러 이곳을 찾았다. 불행히도 9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돼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이 동투르키스탄을 장악하게 되는 13~14세기에는 완전히 방치됐다. 오늘날 우리가 빛나던 과거의 흔적만 보게 되는 사연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다. 과거는 용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미래를 밝히는 길이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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