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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풍 시대와 「명량」 신드롬
열풍 시대와 「명량」 신드롬
  •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 · 문학평론가
  • 승인 2014.08.18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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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영현 문학평론가
영화 「명량」의 인기로 떠들썩하다. 짧은 기간에 많은 이들이 「명량」을 보기를 원했다. 연일 경신되는 관객수가 화제다. 영화로 다 채워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갈증으로 아산 현충사로 발길을 돌리고 『난중일기』나 『칼의 노래』와 같은 관련 서적으로 눈을 돌리는 중이다. 문화적 여파를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휴가시즌 특수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언제부턴가 제작과 배급 그리고 상영까지 장악한 거대 영화 자본의 힘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용을 얻으려는 시장논리가 휴가시즌에 선택한 영화 한 편에까지 스며있다. 자본의 힘이 미친 곳에서 승자독식 논리를 피할 길은 없다. 「명량」을 우리가 ‘선택’했다는 판단은 착각이거나 오해일 수 있다. 푸코나 아감벤이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들의 교묘하고 촘촘한 논리를 들어 강조했듯이, 자본의 현 단계에서 ‘주제적 선택’이 가능한 영역은 없거나 있다 해도 협소할 뿐이다. 취향에 따른 선택이 빅데이터가 만들어 놓은 구획 안에서 의식하지 못한 채 강요당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천만 관객 시대를 맞이해 영화가 여느 공산품과는 다른 ‘문화’상품임을 되새기고, 영화를 그저 ‘관객수’와 ‘흥행’ 여부로 평가하는 생산-공급 중심의 프레임과 거리를 둘 필요도 있다. ‘볼만한 사람은 다 봤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관객이 밀려들었다 해도, 그 쇄도 자체의 의미를 과장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명량」 신드롬을 문화산업의 간교함과 수동적 수용의 결과로만 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화‘상품’이자 상품이 된 문화로서 「명량」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문화 활동을 했다는 충족감 이상의 것을 제공한 괜찮은 문화상품이다. 사회 전체의 상을 가늠하기 어려운 복합적 현실 앞에서 문학이 지엽적이고 개별적인 지점으로 깊이 빠져드는 동안 대중문화의 속성인 시대 감성의 포착에 한국영화가 유능함을 발휘해 왔다. 한국사회가 점차 본래의 긍정성을 상실한 뷰로크라시와 메리토크라시 사회가 됨에 따라 개인과 제도 사이에 소통과 매개의 공간이 실종되고 개인은 사회의 위험과 불안을 각자의 몫으로 떠안고 출구 없는 미로 지옥을 헤매게 됐다. 한국영화는 정치적 퇴행이 가속화된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시대의 불안이나 공포와 소통하면서, 국가를 불신하고 공권력의 선의를 의심하는 정서를 사적 복수가 만연한 세계 속에서 그려냈다. 한국사회 일면에 대한 상징적 반영으로서,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계를 살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명량」 신드롬의 의미는 「레미제라블」(2012)이나 「변호인」(2013) 열풍의 연쇄보다는 ‘나꼼수 열풍’, ‘안철수 현상’, ‘일베 소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 그리고 노란리본,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로 압축된 들끓는 집합적 시대 감성의 행방 속에서 더 뚜렷하게 찾아진다. 「명량」을 두고 사적 복수로만 이뤄진 세계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의 ‘악마’(를 연기한 연기자)가 죽음을 불사하고서야 뚫고 나갈 수 있는 위기의 리더십을 보여준 ‘영웅’(을 연기한 연기자)이 돼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엄정한 진상조사를 요청하는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의 단식투쟁에도 ‘세월호 참사’의 사태 수습이 닻을 내리지 못하고 오리무중인 사이에,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새 인물이 새 정치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한 채 스러져 정치에 대한 더 큰 실망만을 남겼다. 들끓는 집합적 감성은 일상을 사는 평범한 개인이 ‘악마’와 싸우는 중에 괴물이 되고 마는 비극의 원환구조에서 빠져나와 좌/우, 진보/보수의 낡은 이분법에 사로잡힌 리더십을 스쳐 지나는 중이다.

엄밀하게는 ‘성웅 이순신 열풍’으로 압축되는 「명량」 신드롬은 정착지를 찾지 못해 유동하는 시대 감성에 가닿았으나, 그것을 곧 영웅대망론에 가두고 만다는 점에서 아쉽다. 너나할 것 없이 사로잡힌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자기규율의 계기를 마련한다 해도, 역사에 기록된 승전의 재연 속에서 그 리더십이 백성이자 하늘의 뜻으로 향한 것임이 환기될지라도, 그것은 생활습속으로 남은 과거의 흔적이거나 국경과 민족의 한계선을 넘지 못하는 억압적 폭력성의 이면에 가깝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시작하면서도 성웅에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한 김훈의 ??칼의 노래??(2001)가 봤던 것은 깊어진 전쟁을 통해 확인한 ‘적의 백성과 나의 백성의 구분 없음’의 참혹함이었다(“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명량」이 가닿은 것이 유동하는 집합적 감성의 반쪽이라면, 나머지로 빠져나간 것은 김훈의 ??칼의 노래??가 봤던 면, ‘적과 우리’라는 이분법의 기만성에 관한 것이다.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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