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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0일, 끝이 없는 이야기
세월호 100일, 끝이 없는 이야기
  • 권경우 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승인 2014.07.28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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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권경우 문화평론가
다큐멘터리 영화 「블랙딜」은 가까운 일본의 철도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과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다양한 민영화 문제를 매우 꼼꼼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사회성이 짙은 다큐멘터리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 가운데 하나가 선명한 주제의식으로 인해 관객들에게 과도하게 말을 건다는 점이다. 모든 말걸기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 되는 순간, 사실상 중단된다. 더 이상 이해와 설득, 합의, 계몽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블랙딜」은 관객에게 대화를 요청할 뿐 강요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 느낌이다. 관객들은 감독의 메시지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자신의 위치에서 민영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블랙딜’은 검은 거래를 뜻한다. 영화에서는 각국의 민영화 과정에서 기업과 관료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공공성을 팔아먹는 뒷거래를 폭로한다. 문제는 폭로에 있지 않다. 오히려 ‘블랙딜’이 아주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언제부터인가는 마치 당연하고 합리적인 과정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거대 물회사의 전 사장은 뒷거래로 인해 회사에서 물러나고 감옥까지 다녀왔으면서도 죄책감이나 뉘우침이 없다.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펼친다.

영화 「블랙딜」의 강점은 동시대 민영화를 둘러싼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민영화의 고통을 온 몸으로 떠안고 살아가는 남미 시민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들은 민영화의 원인이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됐으며,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 따지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없애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등록금이 비싸더라도 나름 대학 공간의 변화는 환영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성찰을 준다. 민영화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 과정의 ‘블랙딜’, 그리고 민영화 이후의 결과 등에 대해서 고발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0여 년의 세월은 어쩌면 사실과 효과의 간극을 보여준 기간이었다. 대중은 더 이상 사실에 충격을 받거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사실이나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로는 더 이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보노라면 위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수많은 사실과 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오히려 최근 들어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함으로써 마치 누구에게나 일어남직한 우연한 일로 비하하는 일도 있고, 심지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공격하는 ‘보수단체’들이 등장했다. 그들 단체의 이름은 ‘어버이연합’과 ‘엄마봉사부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욕하거나 비난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로 인해 언어의 가치는 죽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설명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세월호에 갇혀 물속으로 가라앉는 순간에 아이들이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이름 ‘엄마’와 그 엄마들을 공격하는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 물음 앞에 우리는 마주서야 한다.?

비슷한 사례는 해외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이스라엘 시민들이 멀리 가자 지구가 보이는 산 중턱에 올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마치 불꽃놀이를 구경하듯이 휴대용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또한 2006년의 사진이라고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아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미사일에 ‘사랑을 담아 이스라엘로부터’라고 적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대에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사실은 참사의 문제 ‘해결’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를 하루빨리 종결짓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실현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유병언’이라는 이름 석자에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유병언에게 세월호의 모든 책임을 지우고 자신들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세월호 참사의 문제 해결이나 종착점은 없다.

‘세월호’는 우리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이라는 이유로 멈춰서는 안 되는 ‘끝이 없는 이야기’이어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세월호’라는 배를 함께 타고 도착항 없는 항해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문제를 확장하고 사유를 창조해야 한다. 모든 철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권경우 문화평론가 ·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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