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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惟의 도덕
思惟의 도덕
  • 교수신문
  • 승인 2014.07.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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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학창시절을 통틀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이론서를 한 권 들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를 든다. 150여 개의 단편들, 작은 아포리즘부터 어떤 것은 다섯 쪽의 에세이에 이르는 斷片들로 구성된 아도르노의 이 책은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망명기인 1944년에서 1947년 사이에 쓰였고 1951년에 출간됐다. 철학을 ‘슬픈 과학’이라고 규정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오늘날 사유가 지녀야 할 최소의 도덕을 섬세한 개인적 경험들에 비춰 서술하는데, 최근에 쓰인 책처럼 읽히며 현재성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나로서는 아도르노의 다른 저작은 이미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유학시절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20세기 최고의 철학서로 추천하기도 한다. 사실 단순히 감명을 받았다는 표현은 어패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철학(이론)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파시즘적·전체주의적 경향 속에서 사유의 말살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 이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등을 끊임없이 성찰했다. 아도르노가 속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적 입장을 ‘비판이론’이라고 총칭하는데, 나는 우선 이 ‘비판이론’을 비롯해 특히 아도르노적 사유의 핵심을 드러내는 「사고(Der Gedanke)」라는 제목의 단편 전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한 이론의 진리란 결국 그 이론이 거두는 결실과 똑같다는 생각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정반대를 믿는 것 같다. 그들은 이론이란 사유에 응용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사유를 절약하게끔 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들은 무릇 표현을 일종의 마지막 고백, 계율 또는 금기의 의미로 잘못 이해한다. 그들은 이념을 무슨 신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들면서 그것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그 이념을 우상처럼 여기고 공격한다. 이념을 대할 때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스로 활동하는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속한다. 어떤 사람이 그 자체가 진리인 문장들을 듣는다고 치자. 그 사람이 그 문장들의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그가 거기에서 사고하고 또 계속 사고할 때 만이다.

오늘날 위에서 말한 물신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상 때문에 추궁을 받는다. 마치 그 사상이 곧바로 어떤 실천이기라도 한 양 말이다. 권력을 겨냥하는 말뿐만 아니라, 모색하고 실험하면서, 그리고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유희하면서 움직이는 말 역시 바로 그 때문에 용납되지 못한다. 그러나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것, 또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바로 사유의 특성이고 그를 위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또한 바로 그 사유의 특성이다. 진리가 전체라는 명제(헤겔, 『정신현상학』 서문―역주)는 그것의 반명제인, 진리는 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과 결국 같은 말이다. 지식인들이 刑吏들에게 답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가련한 변명은―그리고 지식인들은 지난 십년간 지치지 않고 그런 변명을 찾아냈는데―희생자의 사고, 바로 그것을 위해 그 희생자가 죽임을 당한 그 사고가, 하나의 과오였다는 변명이다.”(『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362쪽. 필자의 새로운 번역)


여기서 아도르노는 무릇 이론이란 경험적 현실에 적용돼 많은 수확을 거둬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으며, 또 반대로 사유의 노고를 덜어주는 일반적이고 간편한 공식과 같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론, 이념, 사상은 사람이 활동하는 주체로서 그것에 스스로 참여할 때에만 참다운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사유하도록 만드는 이론과 사상만이 참다운 이론과 사상이다.


지배자들은 직접적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사상만이 아니라 사유행위 자체를―그것이 바로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서 모색, 실험, 상상, 유희해 나가기 때문에―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탄압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것이야말로―왜냐하면 부단히 모색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바로 사유의 특성이고 사유는 스스로 그것을 안다. 따라서 스스로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유는 이미 물화된 사유이고 사유가 아닌 화석화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이론이나 진리가 아니라 바로 사유라는 점, 그리고 사유의 본질이 주체의 노력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이론은 사유의 노고를 덜어주는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를 부단히 촉발하는 이론이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 46번째 단편 「사유의 도덕에 관하여」에서 이와 비슷한 성찰을 전개한다. 그에게 “사유의 도덕이란 집착적이지도 초연하지도, 맹목적이지도 공허하지도, 원자적이지도 수미일관적이지도 않게 사유하는 데 있다.” 아도르노의 사유가 많은 점에서 빚지고 있는 선배 벤야민도 “가장 중요한 사안들에서 항상 급진적으로 처신하고, 결코 일관성을 추구하지 말 것!”이라고 그 자신 사유의 도덕을 표현한 적이 있다.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 아니라 급진성이라는 점을 강조한 이 명제가 내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앞서 인용문에서 아도르노가 이론에 앞서 사유를, 진리에 앞서 주체의 참여를 강조한 점과 연관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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