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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과 책장사
「허생전」과 책장사
  • 교수신문
  • 승인 2014.07.1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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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변씨에게 빌린 만 냥을 밑천삼아 매점매석으로 대박을 터뜨린다. 다시 변씨를 찾아간 허생이 돌려준 돈은 만 냥이 아니라 십만 냥이었다. 1할의 이자만 받겠다며 사양하는 변씨에게 허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허생이 계급의식적 한계를 노출한 것으로 언급되는 대목이다. 저자 박지원이 허생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장치인지, 아니면 저자가 자기도 모르게 마각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투입 자본 대비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허생은 누구보다 수완 좋은 ‘장사치’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장사치임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가 상인이라는 단어 대신 장사치라는 단어를 선택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선비들의 머릿속에서 선비란 장사치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박지원에 따르면 조선 선비들은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조차 좀스러운 일로 여긴다(「葉記」).직접 장사를 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선비가 상황에 따라 상인으로 탈바꿈하고, 상인이 교양을 쌓아 선비가 되는 ‘士商 삼투’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동시기의 명청대 중국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상황은 이러한 통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선비란 족속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이들이 차지할 수 있는 관직의 숫자는 그대로다. 대졸자는 늘어나는데 대졸자를 위한 일자리는 부족한 지금의 현실과 비슷하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조선후기의 사상삼투 현상을 증명할 자료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지만, 적지 않은 선비들이 자의든 타의든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는 농사꾼이 되고, 누군가는 장사치가 됐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간 공부한 것을 활용해 먹고 살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마치 운동권으로 낙인찍혀 취업할 길이 막힌 386세대의 일부가 학원이나 출판계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출판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坊刻本 출판에 나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선비로서의 정체성만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농사와 장사, 강의와 출판은 부득이한 호구지책이며 부정하고픈 현실일 뿐이었다. 이들을 농부와 상인, 교사와 출판업자로 취급하는 것은 관료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도태된 이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을 떳떳이 밝히는 명대 민간출판물과 달리 조선후기 방각본에서 저자 내지 편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사람은 아픈 데를 찔리면 화를 내는 법이다. 허생이 발끈한 이유 역시 아픈 데를 찔렸기 때문이다. 허생은 먹고살기 힘들다는 부인의 성화에 못이겨 장사에 뛰어들긴 했지만, 자신의 행위가 원금에 1할의 이자를 얹어 상환하는 상행위로 귀결되는 결과를 견딜 수 없었다. 허생의 행위는 분명 장사였지만, 허생의 정체성은 그것을 부정했다. 박지원의 입장에서는 허생을 이런 인물로 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박지원은 허생의 입을 빌어 당대 사회의 모순을 통렬히 지적하고 북벌론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허생이 선비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생이 선비의 정체성을 버리고 ‘장사치’의 정체성을 택했다면 그는 현실의 모순과 허구를 지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장사치는 자기를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는 사람이고, 선비는 세상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암의 입장에서는 끝까지 허생을 선비로 남겨둬야 했다. 장사치와 선비의 정체성이 착종된 허생이라는 인물의 성격은 책의 그것과 흡사하다.

책은 상품이다. 책은 상품으로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 서점의 변천사를 다룬 로라 J 밀러의 『서점 VS 서점』(한울, 2014)은 엄연한 상품이면서 상품의 논리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책의 복잡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만약 책이 한낱 상품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일간지에서 매주 지면을 할애해 신상품을 소개하겠으며,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권장도서목록을 내밀며 특정 상품을 소비하라고 권장하겠는가. 심지어 책 도둑이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는 것도 책은 상품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는 관념 때문이리라. 책이 상품이라면, 책을 만들고 파는 행위는 장사다. 저자도 편집자도 출판업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장사치’다. 보다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들에게만 장사를 도외시하라고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만들고 파는 행위가 장사에 머무르고 만다면, 책은 현실에 대해 발언할 기회도 설득력도 잃고 만다. 장사치의 말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도 믿으려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장사로 범람하는 세상에서 책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장사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선임연구원·한국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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