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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과 중원 문화의 융합지 … 과거의 榮華 사라진 동네지만 민족색은 뚜렷
서역과 중원 문화의 융합지 … 과거의 榮華 사라진 동네지만 민족색은 뚜렷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7.0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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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6. 불교왕국 쿠차(1)― 전진왕 부견이 쿠차를 친 까닭은?


언어학적 진실과는 별도로 쿠차에 가면 편지를 써야 한다. 잊었던 친구에게, 가족에게, 연인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 낯선여행지에서 쓰는 편지는 받는 이에게 색다른 감동을 준다. 쓰는이의 행복은 더 말한 나위 없음이다. 무얼 쓸까?

 

▲ 쿠차 외곽 천산산맥 남쪽 천산대협곡 자연경관. 사진 권오형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지만 일상을 그리워하며, 종내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는 왜 파일까? 존재론이 아닌 언어학적 관점에서 다시 묻자면 파는 왜 파라고 불렸을까? 태초에 파가 있었다. 사람이 파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를 파라 부른다. 김춘수의 시 「꽃」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너는 그저 하나의 꽃에 불과했다. 네가 나에게로 와 하나의 의미가 됐다. 네이밍(Naming)은 이렇게 이뤄진다. 작명은 의미화를 수반한다. 이름이 부여됨과 동시에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단순한 존재에서 의미 있는 이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원산지는 우리 땅이 아니지만 어느덧 이 식품은 우리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재료가 됐다. 심지어는 양파도 건강과 영양 면에서 즐겨 먹는 식재료가 됐다. 양파는 파만 먹던 사람들이 좀 묘하지만 파를 닮은 서양 물건이라 양파라 이름 붙였다. 양상추, 양배추, 양다래(키위), 양담배, 양주 등 먹고 마시는 것 말고도 양복, 양장, 양다라, 양동이에 심지어는 양색시, 양공주, 양놈, 양코배기라는 비하적 언사까지 등장했다.


과연 파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시베리아가 원산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중국 서부지방을 원산지로 추정하며 2천200여 년 전부터 재배·이용돼 온 오래된 작물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혜초 스님께서는 『왕오천축국전』에서 파미르 以東의 서역 소륵국(카시가르, 오늘날의 중국식 명칭은 카스)을 묘사하며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으며, 土人들은 모직 옷을 입는다”라고 했다. 뒤이은 龜玆國(오늘날의 쿠차) 조에서도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라고 했다. 그 지역에서는 파와 부추가 흔한 일상의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파미르고원을 흔히들 ‘세계의 지붕’이라고 한다. 왜일까? 이를 중심으로 동북의 천산산맥, 동남의 곤륜산맥, 그 이남의 히말라야, 서쪽의 힌두쿠시산맥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보자. 파미르고원은 그 오른편에 타클라마칸이 있는 타림분지가 있고 그 以東이 중국이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힌두쿠시, 그리고 그 아래로 인도 亞大陸이 위치해 있다. 가히 세상의 중심이다.
그런데 왜 하필 파미르(the Pamir)일까? 언어학자의 사소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정수일 선생은 고대 이란어로 ‘平屋 지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파미르의 훈차어 蔥嶺이 말해주듯, 파미르는 ‘파의 고개(-mir)’인 것이다.
이번 글의 여정은 파미르 동편의 작은 도시,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머나먼 서역, 천산산맥이남 구자(오늘날의 쿠차)라는 나라에 쿠마라지바(344~413, 산스크리트어는 Kumārajīva, 한자 표기는 鳩摩羅什, 구라마습이라고 읽는다)라는 고승이 있었다. 그는 일곱 살 나던 해 구자왕의 누이였던 어머니를 따라 천축에 가서, 정확하게는 또 다른 서역인 카시미르에 가서 小乘 경전과 베다 및 五明諸論을 수학했다. 후일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륵(카시가르)에 1년 가량 머물며 여기서 사차(야르칸드)의 왕자 야리소마(耶利蘇摩)를 만나 大乘 경전인 『아누달경(阿達經)』을 연찬했다. 이런 인연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는 열심히 대승을 설파해 명성이 동쪽의 중국에까지 퍼졌다. 그 때문에 401년 後秦王 요흥(姚興)의 요청으로 國師가 돼 역경작업에 매진한 끝에 經論 74부 300여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삼론종의 조사가 된다. 필자가 이십대 후반 매료된 용수의 『中論頌』도 구마라습의 손을 거쳐 한역된 것이다.


▲ 16세기에 지어진 모스크 쿠차대사. 3천명이 함께 모여 예배를 볼 수 있다.
잠시 이야기의 무대를 오호십육국시대(304~439)의 중국 대륙으로 옮겨보자. 오호십육국시대는 삼국을 통일한 西晉의 멸망 후, 前趙(304~329)가 건국된 304년부터 탁발선비가 세운 北魏(386~534)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 다섯 오랑캐라는 의미의 五胡가 淮水 북부에 16개 정권을 수립하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비 한족을 격하시켜 부르는 명칭인 오호는 흉노, 선비, 저(), 갈(), 강(羌)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려운 북방 이민족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가 반영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갈족은 흉노의 일파이므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고, 갈족 출신 석륵이 後趙를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 탁발부, 모용부, 독발부, 걸복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나라를 세운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민족의 수를 구태여 다섯이라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崔鴻이 쓴 『十六國春秋』에서 유래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어쨌든 이 무렵 요서에 근거지를 둔 선비족의 모용부가 모용을 중심으로 前燕을 세우고(337), 349년 이후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
타 중원에 진출했다. 같은 시기 섬서 지방에서 저족의 부건이 장안에서 前秦을 건국했다(351).부건의 뒤를 이은 선왕 부생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부견은 한족 출신 王猛을 등용해 내치를 다져 국력을 키우는 한편 대대적인 정벌로 각 나라를 정벌해 376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했다. 정도전을 만난 이성계의 모습이 연상된다.


간이 커진 부견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진 정벌을 계획하고는 383년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가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로 인해 전진의 국력은 일시에 쇠퇴하고, 눌려 지내던 각 민족이 우후죽순처럼 독립하기 시작한다. 하북·하남·산동 일대에는 後燕이 건국되고, 병주에는 代(후일의 北魏)와 西燕이 세워졌다. 섬서에는 後秦과 西秦이 생겼고, 감숙에는 後凉이 태어났다. 이게 끝은 아니다. 일련의 힘겨루기 과정 끝에 마침내 탁발선비족의 나라 북위가 436년에 북연을, 439년에는 북량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니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이른바 魏晉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된다.


전편 카시가르 글에서 말했듯, 372년 고구려에 순도를 보내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前秦의 세 번째 왕 부견(재위 357~385)이다. 때마침 부견은 소문을 들었다. 쿠차에 가면 명승 구라마습이 있다고. 자신이 가진 힘에 취한 남자들이 그렇듯 부견은 383년 천하통일을 꿈꾸며 대장군 呂光을 서역정벌에 나서도록 한다. 그리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96만 명의 대군을 징집해 동진을 공격한다. 예상하듯 몰락의 시작이다. 세상의 주인이 될 욕망에 불 탄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대전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후 하북 지역에서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자 요장은 後秦, 걸복국인은 西秦, 모용충은 西燕, 楊定은 仇池 등을 건국해 화북 각지가 분열된다. 하남 지역은 東晋이 점령해 나간다. 385년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부견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자신의 수하였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고 요장의 禪讓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하다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의 최후는 주객전도, 하극상의 완결판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과거의 주인을 딛고 새로운 주인이 된 요장은 승자의 아량으로 부견에게 壯烈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참으로 숙연하다.

▲ 오른쪽 그림은 3세기경의 타림분지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Tarimbecken_3._Jahrhundert.png

이런 와중에 구마라습은 부견이 꼭 모셔오라며 보낸 대장군 여광과 함께 중국에 왔으나 전진은 이미 멸망해 버린 뒤였다. 이에 여광이 하서회랑에서 후량을 세우자 구라마습은 잠시 그의 그늘에 머물렀다가 후진왕 요흥의 초청으로 후진에서 역경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불교 제1의 황금기를 마련한 구마라습이 중국에 도착했을 무렵의 시대적 배경이다. 중국 불교가 흥성한 것은 부견 말고도 중국 각지를 차지한 많은 북방 이민족 통치자들이 새로운 종교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 널리 유포한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에 전해진 미비한 불교가 아닌 보다 완벽한 불교를 알고자 하는 열렬한 구도자들이 나오게 마련. 이들은 불교의 고향이자 부처님의 나라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난다. 법현, 혜생, 현장, 의정, 오공, 혜초 등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승려들이다.


구자 즉 쿠차는 진정한 불교 왕국이었다. 현장의 『大唐西域記』 권12 沙國(쿠차)조에 따르면, 당시 구자에는 가람 수백 소와 승려 만여 명이 있으며, 사람들은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를 공부한다고 했다. 한편 『慈恩傳』은 이 나라에는 대승경전이 많아 십만 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했다. 『자은전』은 당나라 때 慧立과 彦悰이 688년 저술한 『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의 약칭으로 당 나라 때 경·률·논에 두루 밝았던 대자은사의 고승인 현장스님에 대한 전기다. 이랬던 구자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은 후일 돌궐이 서역을 지배하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입된 때문으로 판단된다.

『漢書』에 따르면 쿠차는 서쪽의 36왕국 중 최대의 나라로 인구가 8만1천317명이며 2만1천76명이 무기를 지녔다. 무척이나 상세한 기록이다. 쿠차는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7세기 중엽 타림분지 전역을 장악한 당나라는 쿠차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서역 안정화에 힘쓰면서 동서무역이 번창하게 된다. 고선지 장군이 바로 이곳 안서도호부의 절도사였다. 혜초도 천축고행을 마치고 힘들게 파미르를 넘어 카시가르를 거쳐 여기 쿠차에 당도한다.


구자(쿠차)는 소륵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당도한다고 혜초는 기록했다. 구자는 당시 당나라가 설치한 안서 대도호부가 있었으며, 중국 병마의 대규모 집결처였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고도 했다. 서쪽의 소륵(카시가르)의 주민들과 똑같은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인 승려는 대승법을 행한다 말한 것으로 보아 상당수의 중국 승려가 그곳에 거주하며 불법을 익히고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불교를 신봉하는 이민족이 사는 땅 서역 36국 중 9대국의 하나였던 구자의 현 중국식 한자 표기는 庫車다. 18세기 후반 청나라 건륭제 때의 개명이다. 둘 다 쿠차(Kucha)의 音寫라고 한다. 異表記들은 이 밖에도 많다. 沙, 曲先, 苦先, 苦叉, 屈支, 歸玆, 丘玆, 屈玆, 屈茨 등. 무릇 말에는 다 나름의 뜻이 있으니, 구자라는 나라 이름에도 그럴만한 의미가 내포돼 있음이 분명하다.
그게 무얼까? 먼저 다양한 이표기를 바탕으로 고대음을 재구성해 본다면, 龜玆는 /kuš/ 혹은 /kuč/에 가까운 음가를 지닌 말이었을 것이다. 이 점은 8세기 쿠차 출신의 승려 리언(利言, 禮言으로도 표기)이 편찬한 『梵語雜名』의 구자에 대한 범어 표기가 kushina인 것으로 보아 나름 타당성이 있다. 이를 일본 가타카나로는 구지낭(俱支, kushina)으로 옮겨 적었다. Kushina에서의 -na는 지명을 표기하는 고대 범어다. 다시 말해 ‘쿠시나’는 ‘쿠시의 나라’다.


그렇다면 /kuš/ 혹은 /kuč/라는 소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를 玉이라고 본다. 공교롭게도 玉의 우리말이 구슬이다.
언어학적 진실과는 별도로 쿠차에 가면 편지를 써야 한다. 잊었던 친구에게, 가족에게, 연인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쓰는 편지는 받는 이에게 색다른 감동을 준다. 쓰는 이의 행복은 더 말한 나위 없음이다. 무얼 쓸까? 중원문화, 서역문화 및 외래문화가 끊임없이 융합 발전하면서 풍부한 유적을 남긴 쿠차와 그 주변에는 볼거리가 많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기점으로 漢唐이래 줄곧 서역의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화려한 과거의 榮華는 사라지고 작금은 고작 인구 8만 정도에 불과한 소도시지만 쿠차의 거리는 한족이 많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타 지역과는 달리 위구르만의 민족색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랑해도 좋다. 시내에서는 老街(옛거리)와 박물관이 통합이 된 쿠차왕부, 신장 최대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인 쿠차대사(庫車大寺)는 500m 이내의 인접한 거리에 있으므로 한나절이면 다 볼 수 있다. 쿠차시내를 벗어나면 천산대협곡과 홍산대협곡이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끈다.


천산 남쪽 기슭의 자연경관에 빠지기보다 문화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키질천불동은 필수. 사실 쿠차 일대에는 쿠무투라 천불동의 포함 7개의 천불동이 있다. 소 포탈라궁과 키질야승경은 110km 이내의 거리에서 모두 한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으므로 쉽게 주유할 수 있다. ‘파미르 산악의 제왕’ 고선지 장군의 유적 쿠차고성(庫車古城)은 쿠차대사에서 가까운데, 과수원 사이에 방치돼 있어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다. 안타까운 人心이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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