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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상식'에 던진 도전장…'다른' 해법도 있다
'세계의 상식'에 던진 도전장…'다른' 해법도 있다
  • 박유하 세종대·일어일문학과
  • 승인 2014.06.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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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_① 나는 무엇을 말했나 / 박유하 세종대 교수

20년 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 탓만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은 비판과 잘못된 운동방식에도 있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려 했다.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된 것은 작년 여름, 8월이었다. 사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 인터넷 서점 등에서 책을 구입한 독자들은 비판적인 목소리를 쏟아냈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호의적이고 동의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한국학)가 <레디앙(http://www.redian.org)>(2014.6.11.)에 “박유하 교수가 말하는 ‘용서와 화해’의 이면에 얼마나 끔찍한 국가주의적, 폭력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따지며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과 박노자 교수의 재반박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눔의 집’ 측이 이 책에 대한 ‘판매금지’를 사법부에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학자의 학문 행위와 학문적 자유에 대해 깊이 고민해온 <교수신문>은 저자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깊이 있는 서평과 함께, 과연 한 사람의 학문적 주장을 문제 삼아 이를 사법적 판단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 이것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되지는 않는지 등의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아울러 저자의 민족주의 인식, 동아시아 화해의 방법 등에 대해서도 진정성 있는 학문적 논쟁이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제국의 위안부』 지면 논쟁 첫 회로 저자 박유하 교수의 글을 싣는다.

2014년 6월 16일, 세월호 참사에서 꼭 두 달 후였던 이 날은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세월호만큼의 크기로 기억될 것 같다.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나눔의집에 계신 위안부할머니들을 명예훼손 했다면서 판매금지를 요구하는 고발을 당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법률적 재판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발주체(위안부할머니들이 원고로 돼 있지만 실은 나눔의집 소장과 그에게 의뢰받은 젊은 변호사가 소송의 실질적 주체이다)가 책 내용을 왜곡해 언론에 전달 한 탓에 여론재판이라는 곤욕까지도 치러야 했다.

작년 여름에 낸 책을 둘러싸고 이제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진 배경에는, 내가 책을 낸 이후 나눔의집 위안부할머니들 중 일부 분들과 깊이 교류하게 된 일이 있다. 나눔의 집 소장은 할머니와의 교류를 경계하고 방해했는데(그 과정에서 나는 나눔의 집의 문제를 많이 알게 됐다), 그에 더해, 최근에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는 학자·언론인·지원단체 대표와 함께 열었던 심포지엄(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주최,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2014.4.29)이 언론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이번 고발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도착한 고소장에는, 심포지엄까지도 부정적으로 언급돼 있었다.

그동안 한국의 지원단체는 일본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서 위안부문제의 해결방식으로 ‘법적해결’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정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적해결’이라는 해결방식의 근거로 삼는 논리들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인식과 운동방식이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한국의 생각’이 돼버린 상황에 나는 문제를 느꼈었다. 말하자면 20년 이상 문제가 해결되는 않는 이유는 일본 탓만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은 비판과 잘못된 운동방식에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20여 년 동안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조선인위안부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떤 존재였는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처럼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심포지엄을 열고 그런 움직임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그들은 위기위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고발장에는 “70세가 다 되어가도록 그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 밖에 없다”(134쪽)라고 쓴, ‘해방후 한국’에 대해 말한 부분을 위안부할머니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고 “일본군위안부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훼손”했다고 하거나, 내가 사용한 단어나 인식들을 아무런 근거 없이 무조건 ‘허위’라고 주장하는, 학문적 논의로서는 너무나 거친 주장들이 나열돼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두 가지를 시도했다. 하나는 단순히 학문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국가간 ‘해결’이라는 것이 요구되는 문제에 필수적일 가능한 한 많은 정보와 그에 기반한 새로운 인식제공. 또 하나는 기존 연구들이 ‘전쟁’이 야기한 문제로 풀려한 데 비해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제국’(확장된 국가세력)의 문제로 푸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근대초기 사람들의 ‘이동’과 연계해서 현대의 기지 문제까지 다뤘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제국인 일본을 비판한 것은 물론이지만, 현재의 동아시아 갈등의 배경에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도 환기시키고 싶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는 국가세력을 확장하려 한 ‘제국주의’가 만든 존재지만, 이후의 냉전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또 다른 현대의 ‘제국’이 만드는 위안부문제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이 책의 또 하나의 의도였다.

그동안의 ‘세계의 상식’에 도전장을 던지는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출간 직후의 언론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런 인식은 확산되지 않았고 한일관계는 더욱더 악화돼 가기만 했다. 심포지엄을 열었던 건 그 때문이고,무엇보다 지원단체와는 ‘다른’ 해결법을 원하는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세상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와 함께 기존의 큰 흐름 속에서 이 역시 묵살되고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들?예를 들면 일본이 1990년대에 행한 사죄와 보상이 민간기금의 형태를 띠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중심이 된 것이었다는 사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원단체들의 운동방식(소녀상을 세우거나 일본이 아닌 세계에 호소하는 방식)에 대한 지방지원단체의 비판, 그리고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운동방식과 상식이 되고 만 정보와 인식을 재검토하고 이 문제를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 등을 내보냈다. 그에 기반해, 기존 지원단체의 의견에만 의존하지 말고 위안부당사자를 포함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협의체구축, 두 나라에 부족했던 정보를 전달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일, 바깥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마주보고 이 문제 해결에 나서라는 등의 제안을, 한·일 두 나라 정부와 언론과 지원단체를 향해 던졌다.

말하자면 이번 고발사태는, 그간의 지원단체와 소수의 연구자들의 주장이 위협받는 일에 대한 ‘원천봉쇄의 시도’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도와 왜곡된 보도자료가 야기한 마녀사냥은, 역사문제를 둘러싼 일부 진보진영의 인식과 담론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나는 이번 사태가 나의 책에 대한 관심이나 비판을 넘어 진보담론의 어떤 현장에 관해 논하는 공론의 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일이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내게 갑작스럽게 닥친 폭력적인 사태에도 그나마 의미부여가 가능할 테니까.

박유하 세종대·일어일문학과

와세다대에서 「일본 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연대를 모색하는 한일 지식인모임 ‘한일, 연대 21’을 조직하는 등 탈제국·탈냉전적인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역사화해를 위한 연구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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