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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깃처럼 휘날리는 옷자락의 넉넉한 품새, 거기에 비밀 있었네
새의 깃처럼 휘날리는 옷자락의 넉넉한 품새, 거기에 비밀 있었네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4.06.1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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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24. 고대 복식의 형태적 시원

▲ [그림 5] 靑銅人
인간 삶의 기본 요소는 衣食住다. 그 가운데 의복은 여러 가지 패션의 중심으로 그 양식적 변천은 상징성, 장식성, 다양성을 고루 갖춰 무수한 변화와 美를 유행시키며 인간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이끌었다.
카알라일은 “자연은 神의 살아있는 옷이다”라고 했다. 그런 ‘옷’의 의미는 인간에게 어떤 것일까. ‘옷’은 순수 고유어지만 그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자로는 ‘衣’ 자인데 [그림 1]의 金文 字形처럼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원된 복식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추위와 더위의 기후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기후적응설 ②신체 보호를 위한 실용적 목적의 신체보호설 ③신분, 지위, 계급 등을 나타내기 위한 문화상징설 등이 보편적인 옷의 기원설이다.


원시적 옷은 나무 잎을 엮거나 짐승의 털가죽을 이용했을 것이다. 5천 년 전 이집트의 미라(mirra)는 이미 마포를 두르고 있었고, 1만5천 년 전 북경 주구점 山頂洞人의 유적에선 뼈바늘(骨針)이 출토됐다. 고대에는 지역에 따라서 생산하는 옷의 주원료가 달랐다. 이집트는 麻, 인도는 목화, 중국은 비단(絹), 유럽은 羊毛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넓은 털가죽을 이용해 중앙에 머리 부분만 구멍을 내 덮어쓰는 판초형의 옷(貫頭衣)이 출현했을 것이고, 그것이 차츰 재단과 바느질로 사회상과 문화상을 반영해 소매와 옷깃에 미적인 변화를 주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찰된다.


한국 복식의 기원에 대한 서술은 사전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이 글에선 ‘우리나라 옷의 형태와 양식이 어디서 어떤 발상의 지혜를 얻어 어떻게 디자인하게 됐을까?’라는 문제를 해석고고학의 입장에서 한번 다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골침이 출토됐으므로 옷을 엮고 꿰매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 시대에 북방유라시아 전역에 퍼져있던 스키타이계 문화권내에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키타이란 기원전 7∼3세기에 걸쳐 흑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유목 기마민족을 말하며 ‘초원의 길’을 통해 넓게 전파된 스키타이 문화를 말한다.


▲ [그림 6-1] 持鳥銅人像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 중 대표적인 것이 복식양식이었다고 생각되며, 우리나라 복식의 기본양식이 여기에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기원전 108년에 우리나라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문화권으로 전환됐으며 예복이나 관복에 중국의 복식제도를 도입해 이중구조를 이뤘다. 한편 중국에서도 스키타이계 복장을 호복이라 칭했지만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스키타이계 복장은 수많은 고분출토품의 인물상에서 알 수 있다. 즉 옷은 상하로 구분돼 있고, 소매통이나 바지통이 좁고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 우리 상고의 옷과 흡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 글에선 한국 복식의 형태적 시원에 대해 유목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의 영향과 한사군의 설치에 따른 중국 복식문화의 도입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선 지금까지 연재글에서 펼친 한국 고대문화 상징과 해석의 餘墨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한, 韓服의 형태적 시원에 대한 견해를 밝혀 보려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전개하는 나의 논지는 처음이면서도 기존학설로부터 배척 받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다. 그러나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하면 이런 시도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 [그림 6-2] 銀首人形燈 부분
춘추전국시대 복식의 영향
우리나라 복식사는 2천 년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 시대에 한반도로 유입된 중원의 사람들이 차려 입었을 춘추(B.C. 770~B.C. 403)와 전국(B.C. 403~B.C. 221) 시대의 구체적 물징부터 조사해 우리 복식의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림 3]은 중국 고궁박물원에 소장돼 있는 전국시대의 靑玉人形이다. 크기 6.1cm, 너비 1.9cm, 두께 0.5cm의 자그마한 인형이지만, 사실적으로 표현된 복식과 두식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어딘가 모르게 친근감이 간다. 이 옥인형의 특수한 頭飾은 앞의 글 「상투의 기원과 상징」에서 소개했지만, 전신은 싣지 않았다.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右) 이 인형의 차림은 긴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시대 남산골 딸깍발이 선비상을 연상시킨다.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은 拱手의 자세와 상투와 탕건의 古形과 長袍는 더욱 그런 느낌을 짙게 한다. [그림 5]와 함께 骨相도 조선 사람을 닮았다. 아마도 북방 東胡 계통의 선비족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4]는 1958년 河南省 信陽市 長臺關에서 출토된 높이 64cm의 칠그림이 그려진 나무인형(木俑)이다. 비교적 크기가 큰 이 목용은 춘추말기에서 戰國시기의 유물이다. 두 손을 모아 가슴을 살짝 누르고 있는 모습과 面相으로 봐서 漢族의 목용 같은데, 소매가 넓은 비단옷을 右으로 꼬옥 여미고 허리를 묶었으며, 여민 옷깃 사이로 鮮艶한 內衣가 노출돼 있다. 화려한 전국시대의 이런 복식은 漢代의 귀족계층에 그대로 계승됐을 것이다.

▲ [그림 8] 고구려 무용총 벽화 주악비천상, 무용총 주실 북벽 천정 받침 4층에 그려져 있다

채색과 문양이 화려한 비단 재질의 漢代 복식보다 북방 호복을 한민족의 특성에 맞게 고쳐 디자인한 것이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고대복식이었을 것으로 추량한다. 후대에 나타나는 고구려 벽화와 사신도 등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한민족의 체취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복식에는 그 민족의 얼이 서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림 5]는 1967년 河北省 易縣 武陽臺鄕 高陌村에서 출토된 높이 25.8cm의 청동인상이다. 하북성문물연구소에 소장돼 있는 이 銅人像은 소매가 좁은 장포를 땅에 닿을 듯 길게 드리웠다. 전국시기 燕나라의 복식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자료라고 한다. 즉 胡服의 복식이므로 고대 한복의 디자인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 2천300년 전의 전국시대 복식인 [그림 3]과 [그림 5]는 韓服의 祖形이라할 만한 복식이다. 공통점은 우임과 장포와 허리를 묶는 점인데, 고대 한반도의 복식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 6-1]은 현재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전국시기의 새를 들고 있는 청동 여자아이像이다. 1928년 하남성 洛陽 金村에서 출토된 높이 28.5cm의 이 청동상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雙變을 하고 두 손으로는 玉鳥杆을 꽉 쥐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은 상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가죽신을 신었고 누비옷 치마는 짧다. 이런 차림은 어떤 고정 노역을 담당한 북방 유목민의 여자 노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두꺼운 누비옷과 넓은 목걸이(頸飾), 그리고 옥조간은 이 청동인상의 특징인데 그런 것이 표징하는 상징성은 모두 북방문화의 요소라는 점이 주목할 점이다.


[그림 6-2]은 1977년 하북성 平山縣 中山王 묘에서 출토된 전국 中晩期의 銀首人形燈이다. 머리는 銀, 몸체는 銅의 재질로 된 이 인형등의 높이는 66.4cm로서 비교적 크며 右의 차림이다. 소매가 도포처럼 넓게 쳐졌으며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비단 장포는 허리를 묶어 아래로 내려오면서 통을 좁게 해 마치 일본 기모노와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활한 안광과 입가의 미소는 中山國의 예술적 수준을 과시한다. 중산국은 북방유목민 赤狄의 한 갈래인 白狄의 선우부(鮮虞部)가 세운 나라로서 B.C.506년에서 B.C.296년까지 존재했는데, 『史記』등 문헌에는 기록의 편린만 보이다가 1977년 휘황찬란한 유물로 가득 찬 지하왕릉을 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확실히 알려진 신비의 나라다. 중산국의 複姓 ‘선우(鮮虞)’의 ‘鮮’이 주목되며 그 出來는 고조선과 관계가 없는지 지금 연구 중이다.

天孫族의 태양·새 숭배와 의복
앞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복식을 춘추전국시대의 자료를 통해 추정해 봤지만, 2천 년 전 한반도에서 출토된 구체적 물징이 없으므로 서술의 한계가 뼈저리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와 중국의 使臣圖 등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를 뽑아서 그런 복식의 디자인적 발상의 근원을 밝혀보고자 한다. 중국 복식사 연구서에도 복식 디자인 발상의 근원을 밝혀놓은 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림 7]과 [그림 8]의 삼국시대 회화자료에서 우리는 이 시대 복식의 표준을 읽을 수 있다. 총체적으로 새의 깃처럼 휘날리는 옷자락의 넉넉한 품새, 右의 매무새, 절풍과 고깔관(弁冠)과 拱手의 정중함, 가죽신, 허리띠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그런 점에서 삼국의 복식문화가 본질은 같은 DNA를 갖고 있되 부분적 디자인에 차이를 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연재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에서 母型의 원리는 태양숭배사상과 새 숭배사상의 사유에서 문화의 뿌리가 형성됐음을 밝혀내 일관되게 이를 강조했다. 이런 논리에 견줘볼 때, 고금을 통해 패션의 첨단인 복식에도 그런 사유가 필수적으로 반영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복식의 한 종류인 금관과 절풍이 태양숭배의 반영인 불꽃무늬와 새 숭배사상의 반영으로 된 여러 조형들로 구성됐음을 이미 분석한 바 있다.


나는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현대적이고 글로발화된 것으로 [그림 8]을 꼽는다. 이유는 비상하는 새를 상징한 의상의 흥취,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진 헤어스타일, 과장되고 왜곡된 악기와 S자 스타일의 섹스어필, 상상력을 촉발하는 회화의 구도와 약동미 등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크게 확대하거나 멋지게 패러디해 한국의 무용제와 음악제 등의 포스터와 광고로 활용하면, 1천500년 이전 한국문화의 세계성과 우수성을 만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옷이 날개다=옷은 새[鳥]다
고대문화 가운데 태양과 새 숭배의 원형이 출현한 고대문화는 한국의 고대문화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요소가 많은 홍산문화다. 홍산문화의 옥으로 만든 매(玉鷹)는 동이문화의 특징인 새[神鳥=솔개] 숭배사상이 상징화된 형태임을 파악해 옥응과 옷의 디자인을 대비해 보았더니 그 유사성은 너무나 놀라울 정도였다.


우리 속담에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날개는 활개로 쓰기도 하는데 ‘새’를 가리킨다. 옷을 왜 ‘새’라고 했을까. 그것은 새 숭배의 사유가 낳은 문화의 사상적 원형을 드러낸 말이다.『漢書』 「地理志」에 보이는 ‘翼州鳥夷’에 대한 안사고(顔師古)의 注에 “東北夷들은 새를 사로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껍질을 옷으로 삼는다. 일설에는 海曲에 거주하면서 피복과 기거동작이 모두 새의 형상과 같다(此東北之夷, 搏取鳥獸, 食其肉而衣其皮也, 一說, 居在海曲, 被服容止, 習象鳥也).”라고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태양과 새 숭배사상은 東夷들의 삶과 사상의 원형을 이뤄 모든 문화의 뿌리와 원리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작용을 패션의 첨단인 복식에서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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