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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環計 제시하는 소통자 역할 기대 … 차이 내장한 連帶가 목표
連環計 제시하는 소통자 역할 기대 … 차이 내장한 連帶가 목표
  • 교수신문
  • 승인 2014.06.0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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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진 서울대 교수가 제시한 새로운 지식인 像은?


지난달 31일, 점심시간이 지나자 서울 안국동 안국빌딩 신관 4층 W스테이지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문화의 안과 밖’ 19회차 강연 때문이었다. 강연자는 임현진 서울대 교수(사회학과)였고, 주제는 ‘군중과 지식인’이었다. 이번 강연에서 임 교수는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에서 소개한 현대사회의 ‘타자지향적 인간형’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해, 현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군중과 지식인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지식인의 위상과 역할’을 짚었다. 리스먼은 자아를 상실한 타자지향적 인간인 고독한 군중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찾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임 교수는 이 고독한 군중의 자유를 찾아주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지식사회의 ‘자기검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국내 사회과학계에서는 ‘대중과 엘리트’ 혹은 ‘민중과 지식인’에 대한 논의는 있어왔지만, ‘군중과 지식인’이라는 조합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임 교수의 강연이 한국사회에서 ‘군중과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면서 그의 강연 일부를 발췌했다.

▲ 사진제공 (주)카라커뮤니케이션즈
현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괄목할만한 산업화와 민주화다. 경제적으로 규모면에서 세계 15위에 위치하고, 정치적으로 절차면에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해외 시장이나 자본에 대한 과도한 대외의존성을 넘어설 수 있는 자가충전적인 지식집약적 발전으로 나아가야 하고, 경쟁과 참여가 보장되는 최소주의를 넘어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의 양’이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질’이 중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지식인 전체가 멸종돼 가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서 지식인은 아직 존재하지만 집단으로서 지식인은 이제 부재하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가 미흡하나마 이 정도의 건강성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전체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은 개인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구조의 파행성을 지적하고 인간해방과 사회발전의 열쇄를 체제의 개혁 내지 변혁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지식인은 근래에 들어와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기성질서에 대한 도전과 비판보다 방관 내지 협조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물론이고 정치참여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발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지식인에게서 과거와 같은 체제혁파의 주도 세력으로서 집합적 주체 형성을 기대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지식인의 프티화가 진행 중에 있다.

1950~1960년대의 지사형 지식인이나 1970~1980년대의 투사형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과거의 지식인이 권력과의 관계에서 권력을 직접 담당하고자 하거나, 권력을 정당화하고 운영하는 데 일조하거나 또는 권력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거나, 권력에 저항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면 지금의 양상은 사뭇 복합적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독립적인 지식인도 필요하고, 일정하게 민주화되고 세계화된 권력을 위해 조언하고 지식을 산출해 줄 지식인도 요구한다. 지구적 경쟁에서 살아남을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학생들을 배출할 대학의 지식인도 긴요하다. 그런가 하면 전문 과학분야나 대중문화영역에서 활동할 지식인도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인의 유형이다.


오늘날 지식인 중 대다수는 체제타협적인 참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체제비판적인 도전을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 다소 양가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가적 이중성은 장년세대보다 청년세대로 내려갈수록 보다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성의 中化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시대정신이다. 자유, 평등, 복지, 연대, 환경, 안전 등 여러 가치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므로 국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돼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라고 해서 공정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비판과 질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의 인식과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결국 이 시대 지식인의 온전한 몫으로 남아있다. 지식인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사회발전의 미래비전에 대해 일반대중이 공론장(public sphere)에서 대화와 소통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구실을 해야 한다.


한국의 대학은 지식생산의 장소로서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세계관이 다르다 하더라도 지식의 공공성을 지키고 키워나가야 할 교수들이 입신과 명리에 빠져 절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대학은 지식 재생산 구조에서 서구적 종속을 넘을 수 있도록 모방과 이식에서 창조와 발명으로 가야 한다.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이 함께 갈 수 있도록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도 강화해야 한다. 대학은 차세대의 인재를 길러낼 뿐 아니라 교양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처럼 주요 자원으로 인적자본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국가에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예비지식인으로 인식되고, 대학교수가 전통적 지식인의 대표인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지식인이 개인으로서 현실정치나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부의 책임성이 약할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정당이나 비정부기구가 제대로 표출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제 현 정부에 들어와 권력-지식관계는 바뀔 것이다. 어떠한 새로운 거버넌스 양식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메타거버넌스라는 ‘거버넌스에 대한 거버넌스라’는 성찰적 접근이 요구된다. 직간접적의 정권 참여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지식인의 사회참여 방법이다. 그렇지만 지식인이 권력-지식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공론장에서 거버넌스에 대한 성찰작업을 수행할 때가 아닌가싶다. 당파성을 넘어 공공성과 책임성아래 사회정의를 추구하면서 사회성원을 묶어세울 連環計를 제시하는 지식인의 소통자적 역할이 아쉽다. 서로의 차이를 내장한 연대야말로 한국 지식인이 제시하고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한다. 성현은 이를 ‘君子는 和而不同’이라 이르지 않았던가. 바로 군자형 지식인에 거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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