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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모래바람이 일으키는 낯선 풍경, 그 속에 어떤 친숙함이 있었다
뿌연 모래바람이 일으키는 낯선 풍경, 그 속에 어떤 친숙함이 있었다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6.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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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4. 파미르 고원에 세운 玉의 종족의 도시, 카시가르(1)

▲ 중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 중 하나인 이드카흐 모스크 전경. 신장 지역 무슬림들의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사진 권오형

“우리가 보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 에드가 앨런 포우

길은 있었다.
사람 사는 곳, 사람 가는 곳에는 언제나 길이 있었다.
없으면 새로 만들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 첩첩산중에도 길이 만들어졌다. 사람과 동물의 발길 따라 수많은 길이 탄생했다.
말 등에 소금과 차를 싣고 이동하는 馬房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여 실타래 같은 茶馬古道가 됐다. 이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鳥鼠之路라고도 불렸다.
하늘을 나는 새나 작은 틈새를 기어 다니는 쥐나 다니는 길. 낙타 등에 비단과 종이, 채색 유리병을 싣고 터덕터덕 열사의 사막길을 가는 카라반의 행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가는 중도에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라는 이름의 대상숙소가 하나둘 생겼다. 오아시스 도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잠자리가 있고, 차와 음식을 파는 식당이 생기고, 대상들이 가져온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리고, 인종만큼 다른 종교적 공간 사원(교회나 절, 모스크 따위)이 건축됐다.


고달픈 남자들을 위해서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 이국적 解語花가 단장하고 기다리는 곳. 수개월 이상 걸리는 여행길의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 중요한 건 이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접촉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우쭐대던 심사가 겸손함으로 바뀌는가 하면, 낯선 것에 대한 왕성한 욕구가 배태됐다. 소문이 소문을 낳는 법. 누군가 낯설고 진기한 것에 대한 소문을 안고 들어오면 남아있던 사람들은 호기심에 몸살을 앓으며 길 위에 서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홀연 사막을 마다않고, 눈보라를 두려워 않고 여정에 올랐다. 가족을 부양할 상인으로서, 이방세계의 순례자로서, 성지로 향하는 구도자로서, 혹은 그저 허황된 꿈을 좇는 낭만적 부랑자로서. 순전한 정복욕도 길에 나서는 이유가 됐다. 알렉산더와 고선지는 죽음도 막을 수 없는 고질적 여행벽의 소유자였다. 혜초와 법현, 현장 같은 이들도 기실 외로운 나그네길이 생리에 맞았다. 마르코 폴로, 윌리엄 드 뤼브뤽, 이븐 바투타 역시왕성한 호기심으로 먼 길을 떠났다.


우리도 까닭모를 그러나 까닭 있는 들뜸으로 길 위에 선다. 천년을 기다린 듯 오랜 그리움으로 실크로드를 향한다. 이미 선인들이 밟고 또 밟은 길. 그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보탠다.


카시가르를 찾던 날 서역에서는 드물게 비가 거세게, 그리고 줄기차게 내렸다. 사막지대에 비가 내리는 것은 드문 일이다. 며칠 전부터 내린 비였다. 무더운 사막지대를 여행하는 중에 맞는 비는 신선한 기쁨을 준다. 사막 너머로 지는 석양은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런 장엄한 사막의 석양이 주는 감동에 무덤덤해질 때라면 더욱 그렇다. 언필칭 석양은 아름답다.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줄리 델피의 청순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에서는 바다 속으로 침잠하는 석양의 정경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인도 평원에서 석양을 본 날 나는 밤새 뒤척거렸다. 게으름 때문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회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석양은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온다.


연일 비가 왔고, 카시가르에서는 비가 멈출 것을 기대했다. 적어도 전날까지는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될 것 같아 보였다. 꿈에 그리던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에 선다는 희망으로 오랜 친구들과 이역만리 실크로드까지 먼 길을 온 터였다. 해발 3천600m에 자리한 카라콜 호수까지 올라갈 참이었다. 고대로의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실크로드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행히 세상이 편해졌다. 여름철에 전세기란 이름으로 국적항공사가 인천과 중국 서북방에 위치한 신장성의 성도 우루무치를 왕복하는 항로를 개설했다. 그래서 일단 우루무치로 먼저 들어와 실크로드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북경이나 시안을 거쳐 감숙성의 성도 난저우(蘭州), 이어서 허미(哈密), 둔황(燉煌)을 지나 위먼관(玉門關)이나 양관(陽關)으로 통하는 코스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기행 서역편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 동편의 첫 실크로드 도시 카시가르부터 시작하려한다.


혜초는 해로로 천축에 들어갔다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로에 총령을 넘어 소륵(疎勒, 현재의 카시가르)에 도착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다시 총령에서 걸어서 한 달을 가면 소륵에 이른다. 외국에서는 가사기리국(伽師離國)이라고 부른다. 이곳 역시 중국 군사들(漢軍)이 주둔하고 있다. 절이 있고, 승려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으며 토착인들은 모직 옷을 입는다.”

천산 이남, 피미르 고원 가장 동쪽의 세계
천산이남, 파미르 고원 최동편의 카시가르는 천산 이북 초원의 나라 키르기즈스탄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다. 우선 인종적으로 키르기즈스탄이 키르기즈인이 주종족이라면, 여기는 온통 위구르족 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곳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복합적이다. 우선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모스크(이슬람 사원) 둥근 돔을 장식하고 있는 청색 타일. 청색은 이슬람을 상징하는 색이다. 무슬림 노인들의 은회색 수염. 멋있다. 한눈에 무슬림임을 알아보게 하는 둥근 빵떡모자. 예로부터 머리를 미는 풍습이 있어서인지 타고난 光頭(대머리)인지 모자 아래는 민머리가 태반이다. 키르기즈 남자들은 악 칼팍(Ak kalpak, ‘white cap’)이라 부르는 고상한 느낌의 모직 모자를 쓰지만, 여기 남자들은 타키야(taqiyah or tagiya, 인도나 파키스탄에서는 topi라 부름)라는 이름의 귀여운 사발모자(skullcap)를 머리에 얹는다. 악 칼팍이 스키타이인들의 뾰족 모자 혹은 개구쟁이 스머프나 산타클로스 모자 끝부분을 잘라낸 모양과 닮았다면, 위구르 남자들이 애용하는 타키야는 핸드볼 공을 절반가량 자른 모양, 아니면 넓적한 대접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사발 내지 빵떡모자의 특징은 챙이 없다는 것.


▲ 카시가르 여행지도 지도 출처: http://www.china-tour.cn/Kashgar/kashgar-Tourist-Map.htm
맑은 날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가 올려다 보이고 그 위 푸른 하늘이 일품이지만 타클라마칸사막으로부터 부는 뿌연 모래바람 카라 부란(kara buran)의 색깔도 이곳의 한 풍경을 구성한다.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카라 부란은 ‘검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가라말’은 ‘검은(빛깔의) 말’을 가리킨다. 일본어에서도 검은 색을 ‘구로(이)’라 한다. 그래서 잘 알다시피 ‘黑潮’를 ‘구로시오’라고 부른다. ‘바람’과 ‘부란’은 또 얼마나 닮아 있는가.


후각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바자르에 늘어선 위구르 식당 숯불 위에서 구워지는 양고기 냄새를 빼놓을 수 없다. 양고기를 많이 먹어서인지 이곳 남자들 곁에 서면 야릇한 체취를 맡게 된다. 노린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결코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김치 냄새 혹은 된장이나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다 싶다. 낙후된 지역의 중국 남자들에게서 때에 절은 기름 냄새가 나는 것도 다 사정이 있듯이. 재래시장인 바자르에 가면 동서 교역의 주요도시답게 오만가지 향신료를 보게 된다. 이것이 한데 어울려 때론 코를 맵게, 때론 얼얼하게, 때론 향긋하게 자극한다. 이것이 현 중국 신장성 위구르 자치주 소재의 대표적 서역 도시 카시가르의 냄새요 모습이다. 예고 없이 불어드는 까만 바람 카라 부란. 바람도 저마다 냄새가 있는데 그 냄새는 매캐하다. 일순간에 닥쳐와 시야를 깜깜하게 만드니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카시가르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것이 소리다. 이슬람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기도 시간이 됐음을 알리는 사원 첨탑으로부터의 구성진 아잔 소리. 공명 좋은 사원 안을 울리는 코란 읽는 소리. 이곳 남자들이 조곤조곤 진지한 표정으로 성전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극히 매력적이다. 바자르에서 왁자지껄 들리는 수다도 그 말뜻은 알아듣지 못해도 유쾌한 카시가르의 소리다.


오늘날 이곳 카시가르는 중국 서북방 신장 위구르 자치주에 속한 중국의 영토다. 민족과 언어, 문화, 풍습은 漢族과 달라도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의 땅이다. 그럼에도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탓이다. 재래시장인 바자르(bazaar, 우리가 쓰는 ‘바자회’가 여기서 나왔다)에 나가 보면 이방인의 눈에는 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회족, 위구르족, 키르기즈족, 타직족, 우즈벡족 등의 사람들이 때론 한어로, 때론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통을 한다.


13세기 이곳을 거쳐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칸발릭(皇都) 북경을 방문한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구전 기술 『동방견문록』 제33장에서 낯선 이역 도시 카시가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런 험한 길을 여러 번 지나며 드디어 카시가르(Kashgar)라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전에는 독립국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쿠빌라이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다. 주민은 역시 마호멧교를 믿는다. 이 지방은 매우 크며 도시와 성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카시가르는 가장 크며 또한 중요하다. 이 지방에는 특유한 언어가 있으며 주민들은 상업과 조업으로 생활하고 있고, 훌륭한 화원, 과수원, 포도원 등도 있다. 또한 면화, 아마, 대마 등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이 지방의 상인들은 세계 각국으로 행상을 하는데 사실 그들은 비참하고 천박한 인종으로 제법 변변한 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는 것도 더 말할 나위 없이 형편없다. 주민들로서는 마호멧교도 이외에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도가 있어 자기들의 교기에 따라 생활하며 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돼 있다. 이 지방의 면적은 닷새쯤 가는 넓이다.”


이븐 바투타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13세기의 카시가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그러나 의미 있는 언급을 했다.
“원래 틴키즈 한은 하톼(al-Khata) 지방의 대장장이였는데, 마음씨가 어질고 체구가 건장해 힘깨나 썼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이게 되고, 급기야는 그를 자신들의 두령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제고장을 장악하고 힘을 키웠다. 그의 위력이 일취월장 강화되자 드디어 거란왕과 중국왕을 차례로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병력이 증강되자 후탄(al-Khutan)과 카시가르(Kashighar), 알말릭 등지를 공략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그려진 모습들
짐작하겠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틴키즈 한’은 몽골제국의 창건자 칭기즈칸을 가리킨다. 칭기즈(Chinghis or Genghis)가 틴키즈(Tinkiz)의 구개음화된 소리임을 추정할 수 있는 주요한 단서다. 그렇다면 칭기즈 칸은 ‘뎅기즈(Dengiz, 바다)와 같은 황제’라는 뜻의 칭호다. 그가 몽골초원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해 칸이 되기 전 하톼(al-Khata) 지방의 대장장이였다는 대목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서구학자들이 그의 아명 ‘테무진(Temujin)’을 ‘temu(낙타)+jin(인명접사)’으로 분석하는데, 나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톼(al-Khata) 지방은 거란, 후탄(al-Khutan)은 타림분지 남부에 있는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 남도상의 요지인 호탄을 가리킨다. 호탄은 예로부터 유명한 玉의 산지로 악카시(Ak-Kash, 白玉河)와 카라카시(Kara-Kash, 黑玉河)가 흐르고 있다. 몇 차례의 언급을 통해 이미 독자들도 카라(Kara)가 검은색이고, 카시(Kash)가 옥임을 짐작할 터. 그렇다면 ‘카시가르(Kashghar)’의 어원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도 필자는 믿는다.


파미르의 동편, 알타이에서 발원한 타림분지의 서단에 자리한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이른바 서역북로) 상의 주요 지역인 카시가르가 10세기 초반 카라한조에 정복되면서부터 타림분지 오아시스 국가들의 돌궐화가 시작된다. 『漢書』 卷96 「西域傳」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역은 무제 때 처음으로 통했다. 원래는 36국으로, 그 후 차츰 나뉘어 50여국이 됐다. 모두 흉노의 西쪽, 오손의 南쪽에 있다. 남북에 대산(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이 있으며, 중앙에 강(타림하)이 있다. 동서 6천여리, 남북은 1천여리로 동방은 한 제국에 접하고 경계는 玉門關과 陽關이다. 서방은 총령으로 그 한계를 이룬다. …… 옥문관, 양관으로부터 서역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善國(本名 樓蘭)으로부터 남산을 따라 북은 타림하를 따라 서행해 莎車(야르칸드)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남도라 한다. 남도는 서로 총령을 넘어 대월지, 안식(페르시아)에 이른다. (또 하나는) 車師前王庭으로부터 북산을 따라 서행해 소륵(카시가르)에 이르는 것으로 북도라 한다. 북도는 총령을 넘어 대완, 강거에 이른다.” 여기 카시가르를 지나 파미르를 넘으면 또 다른 서역, 중앙아시아에 당도한다. 사람이 못 갈 곳은 없다. 파미르를 동서로 넘으며 온갖 것을 전했다. 서방의 幻術, 奇術은 물론 천문, 역법이 동방으로 들어왔고, 동방의 비단과 옥이 인도로, 페르시아로, 로마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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