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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인문학은 어디로?
대학의 인문학은 어디로?
  •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 승인 2014.05.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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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수 칼럼_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얼마 전 내가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인문학총연합회(이하 인문총)에서 ‘변화 속의 대학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거리의 인문학은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대학의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인문학 관련 현안을 짚어보고자 한 의도였다.

교육부는 저출산과 고령화의 영향으로 변화하는 사회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 특성화 정책을 내놓았다. 대학 특성화를 통해 정원감축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도에서이다. 정원감축 상황에 내몰린 대학들이 인문학 관련학과들을 통폐합하리라는 예측이 매우 넓게 퍼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을 특성화하겠다고 나서는 대학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문학과 타학문 분야의 융합이나 통합을 통해 특성화를 모색하려는 대학은 있으리라 본다.

이런저런 노력과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한국의 인문대학들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읽기, 쓰의 방식은 물론이고 교육, 토론과 같은 상호소통의 방식 또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인문적 관점에서의 문화학, 지역학, 디지털인문학 등의 새로운 영역 개발이나 인문치료와 같은 실용인문학 분야의 개발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문학계의 현안은 그동안 연구비 증액, 학문후속세대 지원, 대학비정규직인 시간강사 처우개선, 학술지 지원, 인문학 분야 특성에 맞는 평가체제 구축과 같은 것들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영어강의, 영어논문, 국제학술지 게재 등이 대학 인문학에서 강조되면서 학문어, 지적개념어로서의 한글의 가능성이 폄훼되리라는 걱정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젊고 유능한 인문학자들이 영어강의와 영어논문 쓰기에 집중함으로써 20~30년 뒤 한글로 이루어진 한국인문학은 매우 빈약한 형태가 될 수 도 있다. 토론회에서 성균관대 이종관 교수는 ‘모국어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한국인문학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했다.

영어논문은 단지 언어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소위 ‘세계적 학술지’ (내가 속한 철학 분야에서 이런 학술지가 있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의제설정 자체를 외국의 학문공동체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한국학자들의 안테나는 외국, 특히 미국으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 한국사회, 한국인의 고민과 문제는 안테나에 잡히지 않고 이에 관해 학자들은 잡담 수준에서 이야기 하고 치우게 된다. 서울대 강명구 교수는 세계적 학자들이 30명씩 모여 있는 어느 학과에서 한국의 사회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학자가 거의 없는 상황을 두고 한국대학폐망론을 말하기도 했다.

국제적 의제에 참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보편적 중요성을 갖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 학문, 특히 인문학, 사회과학의 일차적 성찰의 대상은 한국인과 그들의 삶일 것이다. 외국문학을 전공하고, 외국철학을 전공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한국의 대학에서 한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한국어로 사유하는 한 학문에 있어서 지역성 문제는 학문공동체 안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논의돼야 한다.

천안함 때에 서해 조류의 유속이 빠르고 시야가 탁해서 구조가 어렵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번 세월호 사태에서도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의 학자들이 우리나라 해역의 특성을 꼼꼼히 연구하고 이 연구에 바탕해서 지역특성에 맞는 구조 기구와 방식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여 이런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영어논문과 국제적 ‘핫이슈’에 관한 연구가 강조돼온 것은 아닐지? 실상 이런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분야에 쌓여있을지? 지금 이런 문제들에 관해 논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왜 문제가 돼야 하는지를 반문하는 젊은 학자들로 대학은 차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에는 하버드, 프린스톤, 예일대학에 한국대학을 제발 접수해달라는 청원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인문학과 인문대학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년보장 걱정으로부터 놓여난 원로급 학자들이 특히 책임 있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한국철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인문학총연합회 대표회장을 맡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박사를 했다. 『칸트: 경계의 철학, 철학의 경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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