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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꿈꾼 근대 민족국가에 대한 이상과 문학
변방에서 꿈꾼 근대 민족국가에 대한 이상과 문학
  • 교수신문
  • 승인 2014.04.1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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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이상주의와 공동체의 언어』 정주아 지음|소명출판|383쪽|25,000원

 

이 책은 한국근대문학사의 첫 장을 여는 순간 마주치는 익숙한 이름들, 가령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억, 김소월 등의 작가가 모두 평안도의 平壤이나 定州에서 출생했다는 흥미로운 현상에서 출발한다. 문학 창작이란 전적으로 개인의 개성에 달린 것이기에, 출생지나 연고지는 우연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학 창작의 토양은 불가항력의 조건으로 놓여 있게 마련이고, 이때 창작이란 공동체 내부에서 산출되는 생산의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은 평양의 大成學校나 정주의 五山學校, 大同江 같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전기적 배경 사항에 놓여 있기 마련인 地名의 자리에서 거꾸로 西北文人의 삶과 문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서북문인이란 범주는 조선조 이전부터 유래하는 ‘서북인’이라는 명칭에 닿아 있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 국경의 변방 지대와 그 주민을 가리켰던 ‘서북인’이란 이름은 얼핏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권으로부터 순혈성이나 반심을 의심 받으며 ‘내부의 타자’ 대접을 받았던 공동체적 균열 지점을 나타낸다. 훗날 오산학교 교주였던 남강 이승훈은 제도권으로부터의 차별이 서북인의 ‘宿怨’이라 대놓고 토로하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기에 이와 같은 차별이 과연 얼마만큼 사실성을 지녔느냐를 고증하지는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소외집단을 자처하던 이들 변방인이 봉건제의 해체와 서구 문명의 도입이라는 근대 전환기를 겪으며 일약 한반도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내부의 타자에서 주인공으로 부상
서북인은 농업 및 상업을 본업으로 삼는 중상인층으로 부를 축적하고, 기독교나 천도교 등 종교를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지역 조직을 구성했다. 개화기를 거치면서 서북 지역은 일찌감치 기독교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지역이자, 동시에 진화론의 위기의식 앞에서 자라난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조선 시대 이래 문화적 이질성, 叛心에 대한 의혹 등으로 정치사회적 차별을 초래했던 국경 지대의 특성이 어느덧 근대적 자질로 탈바꿈한 것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문물과 언어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이들 변방의 땅이 지닌 시공간적 ‘유동성’에 대한 태생적 감각은 때로는 철도나 상업 거래에 구현되는 물질적 이동의 감각으로, 때로는 번역이나 역사 서사와 같은 언어적 감수성으로, 망명과 유학 같은 영토적 상상력으로 전이된다.


이 책은 한국근대문학이 한반도의 변방 국경지대인 서북 지역의 특수성 속에서 잉태됐다는 현상이 갖는 문학사상사적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소외 의식을 내면화한 집단에서 잉태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근대 민족국가를 향한 이상주의로 발현되는 과정에 한국근대문학의 발생사를 겹쳐 놓고 있다. 서북문학을 관통하는 두 가지 정신사적 토대를 상정했는데, 하나는 ‘務實力行’(참의 실천)을 요체로 하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며 다른 하나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역의 문화적 기반 구축을 주도한 기독교의 영향력이다. 실력양성론의 문화문명론 및 청년운동론, 기독교의 보편적 공동체론이 민족문학의 형상과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책의 세부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뉜다. 제 1부에서는 서북인이라는 이름에 담긴 역사적인 소외감이 변방인 특유의 개혁 욕망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한반도의 근대를 바라본다. 개화기 잡지를 통해 서북인 특유의 개혁세력으로서의 자부심을 확인하고, 평안도 지역의 문화적 색채를 좌우한 기독교의 유입 루트와 그 영향력을 되짚는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근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평양의 대성학교와 대동강, 정주 오산학교 등의 장소 표상이 춘원, <창조>파, 백석, 소월 등 서북문인의 자의식과 연결되는 모습을 살핀다. 제 2부는 춘원 이광수와 <창조>파로 대변되는 근대문학의 첫 장면이 신민회 운동을 주도한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 등 서북 지역 민족주의 운동 일세대의 정신사와 영향력 아래에서 열리는 장면을 살핀다.
투쟁의 불꽃으로 ‘산화하는 청춘’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실력을 쌓는 ‘인고의 청춘’이길 요구하는 도산의 민족운동론이 춘원의 문학과 삶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민족운동 차세대라는 책임을 짊어져야만 했던 서북청년의 소명의식이 <창조> 그룹에 어떤 내적 균열을 유발했는가 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돼 있다.


마지막인 제3부는 변방인으로서의 서북인이 감행했던 탈영토적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산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문학운동을 전개했던 춘원과 주요한에 의해 창간된 <朝鮮文壇>과 <東光>을 텍스트로 삼았다. 이들이 내세운 이상촌(조선인 촌락), 노래(민요), 언어(민족어)같은 민족문학의 주요 키워드는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이라는 양가성을 지닌다. 이런 이중적 자질은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적 영향력이 결합한 자리에서 만들어진 서북지역 문화의 특징과도 겹쳐진다. 끝으로 평양 학생문단의 소산인 <斷層>파 문인인 황순원과 김조규를 통해 서북청년의 정신사가 남북으로 나뉘는 장면을 그려 서북문학의 경계를 분단문학으로 확장하며 마무리했다.

공동체의 균열 또는 로컬의 소속감
지역을 통해 문학을 조명한다는 것은 국가를 통해 문학을 보는 식의, 기존의 관점을 반복하되 더 작게 분할한다는 점 이외에 과연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지역은 기존의 ‘민족’, ‘국가’ 등에 내재된 ‘단일공동체’의 통념에 균열을 내면서, 이로써 민족주의문학을 단일집단의 생성에 기여한다는 면에서 무조건 옹호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관점의 대립 구도를 해체하는 계기가 된다. 지역, 즉 ‘로컬’의 존재와 ‘로컬의 소속감’이라는 것을 별도로 인정한다는 것은, 우선 ‘민족’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로써 그들이 내놓은 공동체에의 상상과 그 현실화의 경로가 어떤 역사적 경험 속에서 합리성을 획득한 것인지를 이해하려는 태도로 전환한다는 뜻이다.


역사학계의 업적 이외에, 국문학 분야에서 서북 지역의 특성에 주목한 본격적 연구는 「조선후기 서북지역 문인 연구」(장유승, 2010), 『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김건우, 2003)으로 각각 조선후기 문인 및 전후 월남문인의 문학사상사를 다룬 것이 있다. 이 책은 두 연구를 잇는 거멀못이자 ‘민족주의 문학의 형성’이라는 한국문학의 커다란 주제를 새롭게 논의하는 단서가 되리라. 서북인은 통치 수단으로 동원되는 단일국가론의 허상과 기득권 계층을 재생산하는 사회제도 등에 대한 환멸을 키운, 내부적으로 소외됐던 집단이다. 서북인은 근대적 전환을 구시대와 구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기회라 보았고, 서북문인과 그들의 작품은 서북 지역 및 서북인의 역사 속의 일부인 것이다.

정주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국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움직이는 중심들, 가능성과 선택으로서의 로컬리티』, 『두 개의 국경과 이동의 딜레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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