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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도 교육재정 5% 공약 … 대학 보는 시선도 제자리
1993년에도 교육재정 5% 공약 … 대학 보는 시선도 제자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4.15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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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보면 오늘의 대학이 보인다

경쟁논리 부추긴 정부 … IMF이후 대학 구조조정 급물살

최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교수신문>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지금 한국 대학에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 오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있는 그가 ‘쓰나미’라는 표현법을 쓴 것은 그만큼 사안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 지금 한국 대학가에는 거대한 풍랑이 몰아치고 있다. 지역에 위치한 지방대들이 가장 먼저 이 바람을 맞고 있지만, 수도권 대학들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찻잔 속의 태풍이랄까.

대학 구조조정, 구조개혁 논의가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대학 교육의 질적 제고라는 측면도 구조개혁을 유인한다. <교수신문>은 창간 22주년을 맞아 한국 대학의 변화를 시간을 거슬러 짚어보고자 한다. <교수신문>이 창간되던 1992년에서 2014년까지의 시간 축에 새겨진 대학·교수사회의 변화 양상을 통해 오늘 한국 대학이 직면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성찰해보기 위함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고. 한국 대학이 자신의 전통에서 긍정적인 유산을 자양분 삼아 더욱 도약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과거의 부정적 산물을 이어간다면 이는 한국 사회 전체에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2회에 걸쳐 2014년의 前史로서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대학사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본다.

최근 대학가에 이어지고 있는 절대 화두의 하나가 바로 ‘구조개혁’이다. 구조개혁 주무부처는 교육부, 개혁 당사자는 대학이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교육부(정부)가 구조개혁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교육부는 대학들이 미리 경각심을 갖고 구조 조정을 서둘러 달라고 주문할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낮다.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
바로 ‘대학설립준칙주의’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대학설립 기준을 대폭 완화한 ‘대학설립준칙주의’를 시행한 후 설립된 대학은 일반·전문대학 63개 교에 이른다. 이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부실대학들을 양산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도 이 대목이다. 2012년까지 퇴출된 문제 대학 6곳이 모두 1996년 7월 대학설립준칙주의를 시행한 이후 설립된 대학들이었기 때문.


당시 정부는 획일적인 대학설립 기준에서 탈피해 대학모형을 다양화하고 특성화하겠다며 대학설립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 준칙주의는 기존 제도에 비해 토지, 교사, 기숙사, 실험시설 등 대학설립을 위해 충족해야 할 조건들을 최소화한 후 이를 만족만 하면 설립을 인가하는 걸 골자로 한다. 2005년 국정감사 정책자료집 「대학설립준칙주의 10년, 오늘과 내일」(최재성 의원)에 따르면, 준칙주의 이후 설립된 80개 대학 가운데 10개 대학이 기준 미달이었는데도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조건부 충족대학과 지적사항이 있는 대학까지 포함하면 44개 대학에 이른다.


전문가들이 문제 삼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2016년 학령인구 감소라는 ‘예상된 재앙’을 불과 20년 앞둔 시점이었다. 1996년에 시행된 이 제도는 지난 2013년 8월 교육부가 ‘고등교육 종합발전 방안’을 마련하면서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도입, 시행된 이후 17년 만에 폐지로 결론이 난 셈이다. 교육부는 학령인구 급감, 대학 구조조정 등의 이유를 들었다. 교원, 교지, 교사, 수익용 기본재산 등 설립요건을 강화하고, 재정운영계획과 학사운영계획 등에 대한 심사도 엄격히 하겠다고 밝혔다.

교육정책을 백년대계라고들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7년 만에 정책 폐지라는 건, 교육부로서는 면을 상당히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정책 폐지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수들이 정부 주도 대학 구조개혁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유다. 일부에서는 지금도 정부의 대학구조개혁 드라이브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재정 5% 공약’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의 경제부문 성장에 비한다면 지금 대학에 대한 지원은 매우 답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육재정 GNP 5% 공약’은 대학을 달래는 솔깃한 ‘당근책’으로 통할 수 있었다.

교육재정 5% 확보가 지금도 중요한 이슈이지만, 1993년 <교수신문> 제36호가 마련한 기획좌담에는 이와 관련 흥미로운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김 대통령의 교육재정 GNP 5% 공약이 지켜져야 합니다. 교육재정의 범위를 확대해석해서 GNP 5%를 억지로 만들어 보려는 경제기획원의 시도를 보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내년도 교육 예산안에서도 5% 공약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율운영만 강조하는 정부논리는 사립대학의 비중이나 역할에 비춰 설득력이 없습니다. 국공립이건 사립이건 배출된 인재는 국가발전에 똑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립대학의 비중, 역할에 대한 정부의 인식 문제를 지적한 셈인데, 2014년 오늘의 시점에서 그대로 읽어도 될 정도라면 과연 정부의 대학 정책 철학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예고된 대학 무한경쟁 시대
1994년 12월 16일 <교수신문> 제56호가 전한 기사에 따르면, 교육부는 장차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입학 연령층 인구의 감소, 입학정원 증가, 교육시장 개방으로 대학의 입학경쟁률이 2000년께에는 1대1일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앉아서 기다리다 떨어뜨리기만 하는 현재의 입시방식은 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멀지 않아 도산하는 대학들이 증가하게 돼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 대학이 장생을 키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더구나 최근 교육부가 대학정원 조정과 관련 단계적인 자율화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교육여건 개선과 우수 학생모집을 둘러싼 대학 간의 무한경쟁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이 기사가 지적하듯, 장차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 해결책이 ‘경쟁논리’에 기댄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이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경쟁’과 ‘시장논리’가 횡행하게 된다.


동시에 1994년은 대학 스스로가 ‘대학의 위기’를 인식한 해이기도 했다. 대학 내부에서도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됐다. 자체 진단과 함께 장단기 발전계획 작업을 모색했고, 연구환경과 교육여건의 개선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앞 다투어 토입하기도 했다. 교수업적 평가제, 강의평가제, 교수계약제, 수업일수 확대 등이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대학원 중심대학과 학부중심대학에 관한 특성화 작업도 대학별로 상당한 정도로 논의됐다. 눈에 띄는 것은 이 과정에서 종합평가 항목에 맞춰 산학협동을 강화하고 유사한 대학과 학과를 과감히 통폐합하기도 했다는 것. 작금의 학과통폐합, 학문단위 조정의 뿌리가 20년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 교수업적평가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전개되기도 했다. 경희대, 서울대, 연세대, 인천대 등에서는 1994년 3월부터 업적평가기준 규정을 마련하고 점차적으로 이 제도를 시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고려대, 중앙대 등에서도 업적평가 기준 마련에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프닝도 빚어졌다. K대가 교수업적평가에 강의평가를 반영한다는 일간지 기사가 있었지만,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서둘러 보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대학은 물론 교수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014년 현재, 교수업적평가에서 ‘강의평가’를 ‘연구평가’ 부문보다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교수업적평가 등 개혁안 봇물
비록 외부의 영향에 의해 구동된 것이긴 하지만 1995년, 대학들은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호에 휩쓸린 대학개혁안’에 의해 얼룩진 것이기도 했다. 1995년 12월 18일 <교수신문> 제79호의 기록을 보자. “‘개혁’과 ‘발전’이라는 구호가 대학 교정을 온통 휩쓴 한해였다. 그것은 단지 구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각 대학에서 쏟아져 나온 ‘개혁안’들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를 두고 한 매체는 이렇게 표현했다.

‘대학들이 전쟁을 시작했다.’” 불과 1년 전 도입이 조심스럽게 언급되던 급진적인 ‘강의평가제’는 개혁안으로서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사범대 폐지, 특별전형 확대, 다학기제, 로스쿨, 학부제 도입 등 ‘개혁’ 내용은 훨씬 깊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특히 학부제는 대학 자체는 물론 교수 학생 모두를 긴장시킬 정도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 파급효과도 커서, 올해만 하더라도 벌써 64개 대학이 학부제 도입에 손을 댔다.”


역시 이 대목에서 눈여겨 볼 것은 개혁안으로서 등장한 ‘학부제 도입’이다. 물론 1995년 시점에서 학부제는 ‘의무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이었다. 이로부터 2년 뒤 교육부는 1997년 11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제정해 99학년도부터 의무적으로 학부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정확히 10년 대학 교수사회를 지배하다가 2008년 이명박 정부에 와서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대학 총장간 간담회에서 ‘폐지’ 쪽으로 정리됐다. 일부 대학을 제외한 대다수 대학이 학과제로의 전환을 위한 검토 작업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이 역시 누구 하나 정책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학부제와 함께 교육부는 대학간 경쟁을 더욱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1996년은 누군가의 말처럼 ‘보고서 내다보니 1년이 훌쩍 가버린’ 바로 그런 한 해였다. <교수신문> 기사는 1996년 한 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각종 평가에서 우수한 평가를 얻은 대학들의 자축연이 심심치 않게 열렸고, 평가에서 탈락된 대학은 내부 분란과 함께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 엇갈린 풍경을 자아냈다. 교육개혁 추진 우수대학 선정에 따른 재정 지원과 대학자구노력 지원비의 본격적인 차등화 등 교육부가 일련의 정책을 통해 대학간 경쟁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대학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일면 필요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경쟁 부추기기가 대학간의 협력 분위기를 깨는데다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강하게 일었다.” 실제로 1996년 11월에 열린 전국기획처장협의회에서는 교육부의 지나친 경쟁 부추기기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대학이 갈등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며 이를 전면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인문학 위기’ 선언이 불거진 것도 바로 이 해였다. 1996년 11월 7일 국공립대 인문대학장협의회가 ‘인문학의 위기’ 선언을 채택했다. 물론 인문학 위기론은 그간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이렇게 ‘선언’ 형태로 공식화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기사가 지적하고 있듯, 대학간 경쟁, 취업 준비 과정으로의 대학의 위상 전락 등 인문학 위기를 부채질한 요소는 상당히 축적되고 있었다. 오늘날 대학이 취업 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일부 인문과학 분야 교수들의 자조적인 한탄은 이렇게 긴 시간 담금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확실히 역사는 반복되는 게 틀림없다. 최근 대학들이 ‘대학총장직선제’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폐지하고 있지만, 1996년에도 총장직선제 폐지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국민대, 연세대, 울산대 등에서는 총장직선제를 폐지했다. 1988년 민주화의 열기와 더불어 도입된 총장직선제가 고비용 저효율, 교수간 편 가르기 등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논리에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총장직선제가 만일 고비용 저효율이라면,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도 그런 평가를 피해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 무렵 3월 개강과 함께 서울대가 추진한 ‘서울대특별법’은 다른 대학으로부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한편에서는 ‘서울대 폐교론’을 둘러싼 공방이 잇따르기도 했다. “서울대가 개교 50주년을 맞아 제출한 시안의 골자는 총리직속기구로의 관할권 격상, 독립예산권 확보, 총장권한 강화를 통한 자율성 제고, 대학원중심대학으로의 학제 개편 등이었다.” 서울대법은 이후 2006년 2월 24일 충북 수안보에서 열린 학사운영협의회에서 ‘서울대특별법 시행령안’으로 거듭났다. 서울대만이라도 제대로 세계 대학들과 경쟁하게 하자는 게 골자였다. 물론, 1995년 이수성 총장 재임 시절 ‘서울대 특별법’ 제정 시도가 그 기원이다. 2010년이 저물어가는 12월 8일 당시 한나라당은 서울대 법인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서울대학교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직권상정해 처리했다.

교수임용 벽 허문 현장전문가들
1997년은 대학 사회, 특히 교수사회에 강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한 해였다. “명강의는 더 이상 석·박사학위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학의 두터운 교수 임용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석·박사 학위자가 아니면 교수직에 임용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장 전문가들의 대학 진출이 뚜렷해졌다. 현장 전문가의 등용이 활발해지는 등 임용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투영된 한 해였다.” 전임교수, 외래교수, 객원교수, 기금교수, 대우교수 등으로 불리는 ‘겸임교수’에 현장전문가들의 진출이 활발해진 것이다. 영화감독 이장호, 작가 이문열, 만화가 이두호·이현세, 농구감독 방열, 바둑인 정수현 등이 이 시기 교수로 이동했다. 이것이 오늘날 다양한 산학교수 임용의 바람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대에서는 또 다른 바람이 불었다. 1998년부터 일정 기간동안 계약제로 교수를 채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것. 우수한 교수를 확보한다는 긍정론과 함께 교권과 신분을 위협하는 제도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부정론이 확산됐다. “서울대는 ‘교육과 연구능력을 검증한 후에 정규 교수로 임용함으로써 자기 개발의 의욕을 고취하고 가장 우수한 교수진을 채용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정규 교수 정원과 계약직 교수 정원으로 구분하고 계약직 교수는 부교수, 조교수 4년, 전임강사는 2년 범위 내에서 계약에 의해 임용한다는 구상이었다. “전임강사는 원칙적으로 전원 계약직으로 임용하고, 부교수와 조교수는 당분간 정규직과 계약직으로 구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서울대의 이러한 임용계획은 이후 대학사회에 비정년트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IMF 그리고 대학 구조조정
IMF와 함께 시작된 1998년은 대학들에게도 어두운 시기였다. “지난해 말 불어닥친 IMF 한파의 영향으로 올 한해 대학은 몸살을 크게 앓았다. 가장 큰 원인은 IMF로 인해 가뜩이나 열악한 대학재정에 구멍이 뚤린 것. 막대한 환차손과 각종 수익사업의 위축으로 그 결과 대학들은 1억5천8백만 달러라는 외채와 쌓여만 가는 빚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국고 지원금 감소, 산학협동 연구계약 규모 격감, 등록금 동결조치와 휴학생의 증가로 인한 등록금 감소는 재정자립도가 낮은 대학들에게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지역소재 소규모 대학들의 경우, 편입학 제도가 확대됨에 따라 재학생들의 무더기 휴학사태가 빚어졌고 신입생 등록률 또한 저조해, 교직원 급여를 체불하고 기본적인 학교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경영상태를 경험해야 했다.” 이 기사로만 보더라도 1998년은 2014년을 살아가는 한국 대학의 前史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1990년대가 이미 2010년대의 한국 대학의 운명적 좌표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IMF는 대학들에게도 허리띠를 꽉 조르게 만들었다. 재정난을 덜기 위한 ‘구조조정’이 이 시기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현재적 시점에서 아쉬운 것은 구조조정이 ‘재정난’에 의해 촉발됐고, 그 방향성 역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맞춰졌다는 사실이다. 대학의 역할과 학문체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이 결핍돼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2014년 오늘의 좌표를 다시 따지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IMF 체제로 증폭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각 대학들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중복된 업무를 수행하던 부서를 통합하고 비생산적인 부서는 정리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기업인지, 대학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접근이었다. “유사학과 통폐합, 정원재조정 등 학과에 대한 구조개혁 또한 활발했다. 지원율이 저조한 비인기학과는 폐과, 또는 축소하고, 특성 있는 학과를 집중육성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실적 없이 이름만 내건 채 운영돼 온 각종 부속·부설기기관과 연구소에 대해서도 평가를 통해 예산을 차등지원하고 자구노력이 부족한 유사연구소의 통·폐합을 유도해 그 수를 줄여가고 있다.” 이 기사는 1998년을 이렇게 정리했다. 마치 요 근래 벌어진 대학사를 정리한 내용 같지만 말이다.


드디어 199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도대체 대학사회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공익이사제 도입이 무산됐으며, 세계수준의 대학원 육성을 통해 대학의 연구력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겠다는 교육부의 야심찬 의지로 시작된 두뇌한국(BK)21사업은 계획단계부터 1999년 한국 대학과 교수사회를 들끓게 했다. 1조4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이 집행되는, 정부수립 이후 단일사업으로는 최대 금액이 대학에 지원되는 BK21사업에 대해 교수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교수들은 ‘대학의 서열화 고착’, ‘기초학문의 붕괴’ 등의 부작용을 지적, 수정과 폐지를 요규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4·19 이후 처음으로 가두시위까지 벌였던 교수들은 사업이 파행적으로 진행될 경우 막대한 금액만큼이나 대학사회의 황폐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문제제기를 했고, 경북대, 부산대 등 국립대 교수들은 단식투쟁도 불사했다.” 교육공무원법이 개정되면서 국공립대에 계약제, 연봉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사립대학이 아닌 국공립대에서 ‘시장논리’를 적극 수용한 것이다. 1999년 2학기 들어 서울대는 교수의 정년보장 범위를 축소한 교수인사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이제 대학사회에서 ‘계약제’, ‘연봉제’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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