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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獨文學者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아름다운 이유 “巫俗은 한국 문화예술이 녹아 있는 뿌리이자 정신”
원로 獨文學者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아름다운 이유 “巫俗은 한국 문화예술이 녹아 있는 뿌리이자 정신”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4.01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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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24.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한국공연예술원 샤마니카 프로젝트의 하나인 창작극 공연은 2010년 「짓거리-사이에서 놀다」로 시작했다. 사진은 2013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피우다」 공연의 한 장면이다. 전통의 원형과 현대화된 마임과 음악을 엮은 이 공연에서는 한국공연예술의 원형을 드라마로 재현해 샤먼의례, 불교의례, 궁중의례를 접목했다.    (사진제공 = 한국공연예술원)

"누군가 해주길 30년 동안 기다렸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인간문화재들 밥그릇 싸움과정부의 탁상공론만 확인한 시간들이었죠. 제 스스로 만든 사명감은 아니지만 누군가해야 할 일이기에 지금까지 해오고 있어요."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은 독문학을 전공하고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에서 30년간 연구와 강의를 했다. 그런 그가 '무속'과 '굿'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궁금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속담이 있다. 무당이 돈이나 쌀을 얻으려 가가호호 돌아다니는 일을 계면돌기라고 하는데, 이렇게 무당이 계면돌면서 하는 굿이 계면놀이고, 굿을 끝내고 나눠 주는 떡을 계면떡이라고 한다. 이 속담의 유래다. 무속신앙 가운데 무당은 예나 지금이나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이에게도, 구경꾼들에게도 천대받아왔다. 게다가 1970년대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무당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줄어 현재까지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굿에서 한국공연예술의 원류를 찾는 사람이 있다.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79세·사진)이 바로 그다. 1960년대 독일 튀빙겐대에서 릴케의 시와 표현주의 연극을 전공하고 귀국해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에서 30년간 독문학자로 가르치고 연구했다. 서양 인문학자와 무속의 만남. 이 기묘하고도 흥미로운 조합이 궁금해졌다.

독문학자인데 이 길로 빠져들게 된 배경을 묻자 양 이사장의 표정이 좀 그렇다. “저는 전통을 두 가지로 생각해요. 후학들이 보고 지킬 수 있는 어떤 모범을 제시할 수 있는 전통은 지켜야겠지만, 또한 전통은 변형할 수 있는 모범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지키기 위한 전통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봐요.” 아차, ‘지키는’이란 말에 ‘발전적 창조’의 개념도 포함돼 있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서야 양 이사장의 얼굴이 예의 그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다.

한국공연예술의 원류를 巫俗에서 찾은 계기를 듣기 위해서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 이사장 자신이 그 길을 가기로 선택하기까지 3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연극이었다.

국내 초연 ‘부조리극’에서 回心하고 고민 시작

1967년 귀국한 그는 이화여대에서 매년 원어연극을 올리는 조건으로 교수의 길에 접어든다. 연극을 보면서 그는 국내 최초의 부조리극 「웨딩드레스」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배우는 시공간을 장악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엉거주춤한 배우들이 그냥 스토리를 엮어가는 무대였죠. 연출가들도 스타니슬랍스키라든지, 체호프, 브레히트를 서양식 방법으로 가르치더군요. 인간도 생물이기에 山川과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 있어요. 산천마다 호흡법, 발성법, 몸짓도 다를 터인데,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한 채 배우 훈련을 시키고 있잖아요.”

빨간, 노란색 가발을 쓴 배우들이 나오는 번역극 일색이던 당시 연극계에서 그는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인간문화재들의 공연에서 그 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간문화재들을 찾아다니면 다닐수록 그들의 技藝가 부분 부분으로 분절돼 있음을 느꼈다. 그가 원하는 종합적인 장르는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번뜩 이런 생각을 한다. ‘관객들이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경험할 수 있었던 형태의 공연은 뭘까. 돈 안내고 떡 얻어먹는 굿을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게 가장 한국적인 사회의 모형 아닐까?’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무당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틈틈이 무당들을 찾아다녔다. 무속에 뭔가 한국공연예술의 뿌리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평민들이 언제 무슨 구경을 했나요. 조선시대부터 산대놀이나 중국 사신들 행렬 정도였겠죠. 궁중의례는 궁중 사람이나 봤을 테고요. 저는 관찰자(watcher)의 관점에서 굿을 공연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는 공연이라는 개념이 없는 나라에요. 보는 훈련이 안 돼 있는 사람들에게 서양 것을 공연하고 보라니 말이 됩니까?”

양 이사장의 말에 따르면 굿 안에는 우리 문화의 거의 모든 것들이 녹아있다고 한다. 여러 형태의 클라이맥스, 호흡법도 자연스레 굿에 녹아 있다는 설명이다. 조선시대 중과 무당을 배척해 산으로 쫓아버렸지만, 민중들의 내면에 가려진 욕구들을 풀어내는 굿은 어렵사리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공연예술로서 보는 훈련을 시켜준 것은 바로 ‘굿’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주지하다시피 무당은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뉜다. 일부 학자는 한강 이남을 세습무, 한강 이북을 강신무로 나누기도 하지만, 통상 강신무는 갑자기 신이 내려 신병이 들어 무당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예능을 배우지 않고 무당이 된 경우다. 세습무는 문자 그대로 조상 대대로 무당 집안에서 자라나 스스로도 무당이 되는 경우다. 세습무의 대표적인 예가 故박병천으로 12대째 무당이었다. 세습무의 경우 복식도 평상복에 준하고, 진도 지역의 경우 완전히 생활화된 풍습으로 친다. 강신무는 황해도에 주로 많다. 흔히들 무당 하면 떠올리는 ‘작두타기’가 바로 강신무의 白眉다. 요즘 무당들은 대부분 작두를 탄다. 화끈한 퍼포먼스로 돈을 많이 벌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많은 무당을 만나왔던 그는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만신」(박찬경 감독)의 주인공 김금화 무당도 진즉에 만났다. “김금화 씨는 무당 중에 외무대신 격이라고 할까요. 무당으로 기품도 있고, 언행도 매우 세련된 분이죠.” 그의 기억에 깊게 각인된 무당 중 한 명은 故 김유감 만신이다. 어머니가 官에서 굿을 했던 분으로 그녀는 1996년 첫 서울새남굿 보유자로 지정됐다. 양 이사장은 ‘새남’의 어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궁중에서 이른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혼령을 보내는 굿을 새남굿이라 하는데, 그 굿은 서울 궁중 옆에서 하는 것이니 굉장히 화려하다고 설명한다. 김 만신과는 일본도 함께 다니고, 1997년에 몽골 무대에도 섰다.

두세 달 힘들게 연습한 작품이 2, 3일 공연으로 끝나는 것이 안타까워 그는 1978년부터 <주간조선>에 연극평론도 시작한다. 번역활동도 겸한다. ‘극단 76’에 의해 1978년에 국내 초연돼 센세이션을 일으킨 안티 테아트르극의 대표작,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번역한 이도 그다. 1968년부터 그는 세계공연예술협회(ITI: International Theatre Institute)에서 활동했다. 유럽 국가들이 2년마다 돌아가며 개최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비롯해, 오페라, 발레, 연극, 무용 등 공연예술의 모든 장르가 망라된 공연예술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행사였다. ITI는 양 이사장이 세계를 보는 창문이었던 셈. 1981년 동독에서 열린 ITI 심포지엄에 그는 이택주, 이상일 연극평론가와 함께 참가한다. 그는 오태석 연극에서 한국어와 굿 장면의 응용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논지는 명료했다. “우리 전통의 뿌리는 굿에 있다. 굿 속에는 서양의 수사학을 통해 분화되지 않은 핵심이 있는데, 그 속에서 우러나는 것을 뽑아야 한다.” 이 발표로 그녀는 일약 명사로 떠오른다. 기독교 문화로 파괴된 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향수가 외국 학자들에게도 깊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통합적 시각에서 한국문화 읽어내는 탁월한 눈길

이후 평론가협회장과 ITI 회장을 역임하며 그녀는 한국 연극(계)을 유럽에 소개하는 일에 매진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에게 든 생각은 ‘우리 뿌리 찾기가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연극이 서양 것인 양 온 세계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유럽의 저명한 연출가가 필리핀에 가서 연출하고, 태국에 가서 연출했어요. 이거야말로 문화침략의 또 다른 형태 아닌가요? 문화는 자존심이고 정신인데, 어떻게 겉만 보고 좋다고 그걸 그대로 모방하는지…”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제대로 된 교육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ITI를 통해 외국에 나갈 때마다 별도로 시간을 내면서까지 그 나라의 공연교육기관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가운데 1993년에 들려온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소식은 그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가져다줬다. 음악 따로, 영상 따로, 연극 따로, 제각각의 전문학교 시스템으로 드러난 한예종의 모습 때문이었다. “한국의 문화예술은 모든 게 다 모아져서 녹아내려오는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게 중요한데, 그렇게 가르면 안 되지요. 양반사회와 상놈의 사회, 이 구분이 상존하면서 인간문화재들의 태도나 작업들도 이미 칸막이로 막혀 있는 상태에요. 이런 접근태도라면 백날 가봐야 똑같다는 생각이었지요. 통합적으로 우리 문화를 보는 시각도 없고, 그걸 찾아야겠다는 사람도 없었으니…”

결국 그는 1991년 ‘한국공연예술연구회’를 만들었다. 1967년부터 누군가가 이 일을 시작해주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 연출가와 작가들도 합류했다. 그리고 이어령 당시 문화부장관을 찾아간다. “배우를 가르치기 위한 체계화 작업으로 1권 숨쉬기·소리내기·말하기, 2권 흉내 내기·표정·몸짓, 3권 한국인의 자연관·색채관·우주관으로 구성한 세 권의 교재를 준비한다고 설명하고 지원도 받았어요.”

1995년 한국독어독문학회장직을 끝으로 이화여대에서 퇴임한 그녀는 1991년 발족한 한국공연예술연구회를 ‘(사)한국공연예술원’으로 바꿔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의 샤먼 문화를 ‘최초의 인류문화’로 간주한 ‘샤마니카 프로젝트 I’을 시작, 한국공연예술의 뿌리를 샤먼 리추얼(shaman ritual)인 굿에서 찾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2011년부터 진행한 ‘샤마니카 프로젝트 II’에서는 韓劇의 원형, 즉 우리 문화의 뿌리로 작용하는 세계관, 우주관, 시공간관, 색채관과 그로부터 출현한 복식, 의례 등을 살폈다.

파편화의 시대를 맞아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한 패러다임 찾기의 일환인 셈이다. 이후 불교의례, 궁중의례 등에서 한국인의 철학관을 살피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우리 전통 樂·歌·舞와 오늘의 무대를 비교하면서 2016년에 샤마니카 세미나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계획이다. 한국공연예술원이 20년을 맞는 해다. 샤마니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줄기인 韓劇 만들기 프로젝트도 계속할 예정이다. 2010년 「짓거리-사이에서 놀다」, 2012년 우주목 1 시리즈 「바리」 등을 비롯해 전통을 현대화한 한극 만들기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관련기사 <교수신문> 721호, 「18년째 이어지고 있는 샤마니카 세미나」)

그 주변의 문화계 인사는 참 두텁다. 부친이 의사였는데, 그녀가 어린 시절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냈던 故 최순우를 비롯해 마해성 등 문화인들이 문지방을 닳도록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 역시 이생강, 이매방 씨를 비롯해 수많은 당대 문화인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중에는 기업인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이다. 그와는 서울사대부고의 후배로 인연을 맺었다. 성 회장은 한국공연예술원에 대한 외부 후원이 전무하고 문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을 받을 경우에만 연극을 올리는 양 이사장의 작업과 처지를 존중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양 이사장은 지난해 그의 도움으로 「피우다」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굿은 옛 생활풍습의 하나이자 무속신앙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황해도 연안 출신인 그녀는 정작 어릴 때 굿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교회 건축까지 한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셨고, 아버지는 뿌리 깊은 유가 출신이다. 그는 무속신앙에 믿음이 있을까. “토속신앙은 단순하고 그 단순성으로 유지가 될 뿐 그 이상의 역할은 못해요. 하지만 무속신앙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여러 가지 문화가 녹아있는 뿌리와 정신의 역할을 합니다.”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 싶었다.

진정한 ‘문화융성’의 조건

양 이사장이 보는 우리 공연예술계의 문제점은 뭘까.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일개 사단법인이 20년째 하고 있어요. 1991년에 시작한 샤마니카 페스티발을 보고, 중국이 그걸 그대로 베껴가더군요.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연극 교육이 바뀌었어요. 초청받아 가보니, 아이들을 위해 할로윈 페스티발을 하는 걸 보며 한 번 더 놀랐죠. 문화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접하면 좋은 거니까요.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아요. 오죽하면 제가 15년 전에 했던 프로젝트를 정부 기관에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똑같이 하더라고요. 더 안타까운 건 나는 무당을 통한 우리 문화의 격상을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정신’이 빠진 일회성 행사를 한 것이죠. 이것이 우리 문화의 현 주소입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곧 팔순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는 바르기 그지없고 목소리도 힘이 있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기는 여전하다. 늘 낙천적으로 살았던 그이기에 묵묵히 계속해서 이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해주길 30년 동안 기다렸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인간문화재들 밥그릇 싸움과 정부의 탁상공론만 확인한 시간들이었죠. 내 스스로 만든 사명감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지금까지 해오고 있어요.”

그의 작업은 독문학계, 연극계, 민속학계에 환영받지 못했다. 독문학자로 30년, 한국공연예술의 뿌리를 찾아 굿판을 찾아다니며 학술적 논의를 펼쳤던 20여년. 그의 작업을 연극평론가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에도 눈이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눈이 있어서 시대가 흘러갈 때 임무를 줘야할 사람들을 그때그때 발견해 임무를 주는 것 같다. 우리에겐 양혜숙 이사장이 그런 사람이다.” 아직도 그가 할 일은 많아 보인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작업이 공론화되고, 그로 인해 한국이 진정한 ‘문화융성’의 시대를 맞이할 날이 오길 바란다.

글·사진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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