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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입양 그리고 신과 신앙에 대한 ‘돌직구’
강제입양 그리고 신과 신앙에 대한 ‘돌직구’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3.31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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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필로미나의 기적」의 여운

하룻밤 뜨거운 만남으로 생긴 아이를 낳은 것이 죄일까, 세월이 흘러 입양 보낸 아이를 찾는 것이 죄일까. 전직 BBC 기자 마틴 식스미스의 실화 저서『잃어버린 아이』를 각색해 다음달 10일 개봉하는 영화「필로미나의 기적」(감독 스티븐 프리어스)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모든 세상이 새로워졌다고. 필로미나의 결코 가볍지 않은 여정을 따라가는 98분의 힘은 무엇일까. (사진제공 호호호비치)

아일랜드의 꿈 많던 10대 소녀 필로미나는 한 순간의 실수로 미혼모가 되고, 강제로 입소하게 된 수녀원에서는 아이를 돌봐주고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을 빌미로 고된 노역에 시달린다. 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하루에 단 1시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천사 같은 아이는 네 살이 되던 해 어느 부잣집으로 입양된다. 수녀원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생모에게 입양사실을 사전통보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를 잃어버린 필로미나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는 죄책감에 이어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두 번째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할머니가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가던 그녀는 딸에게 처음으로 고백한다. “오늘이 그 아이의 50번째 생일이야.”신문 주말섹션용 휴먼스토리 기사감을 찾던 전 BBC 기자 마틴이 여기에 합류하며 필로미나의 잃어버린 아이 찾기는 급물살을 타고 그녀는 아이가 입양됐다는 미국으로 향할 결심을 한다. “그 아이도 나를 생각했는지 알고 싶어. 난 매일 걔를 생각했거든.”

실화가 주는 힘과 연기파 배우들의 노련함

영화는 필로미나와 마틴,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는 로드 무비 형식이다. 필로미나 역은 명불허전 배우 주디 덴치가 맡았다. 1961년 런던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창립의 주역인 그녀가 연기 인생 56년간 간 세운 공로는 가히 현존하는 여배우 중 최고에 속한다. 그녀가 아닌 필로미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종을 좇는 예리하고 이성적인 전직 기자 역은「박물관이 살아 있다」(숀 레비 감독, 2006),「 퍼시잭슨과 번개도둑」(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2010) 등 주로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영국 국민 배우로 등극한 스티브 쿠건이 맡았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자, 각본가로도 참여했다. 그는 함께 연기한 주디 덴치에 대해 “세트장에서 주디 덴치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그녀는 완벽했다. 필로미나 그 자체였다”라고 회고한다.

뭔가 어울릴 듯 하면서도 묘하게 어긋나는 두 사람의 조합은, 영화가 그 주제의식으로 인해 심각해질 시점을 정확히 파악해 적절한 위트를 삽입함으로써 균형을 잡아준다. 긍정적이며 신실한 신앙을 가졌고, 또한 로맨스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필로미나를 활용해 특종을 좇기에 여념이 없는 마틴. 그런 그에게 필로미나는 “그땐 그게 너무 좋았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지”라며 아이를 갖게 된 하룻밤의 추억을 솔직하게 얘기한다. “신은 왜 인간에게 성욕을 준 걸까요? 참는 거 보며 즐기는 건가?”라고 마틴이 되받아 치는 장면을 보면 <Time Out New York>이 이 둘을 가리켜 ‘올해 아카데미 최고의 커플!’이라고 말한 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하지만 필로미나는 아들과 가까워질수록 더 걱정이 많아진다. “그 아이가 노숙자면 어떡하지, 약물 중독일 수도 있어. 아니 비만일 수도 있어. 마틴, 나 아일랜드로 돌아갈래.” 오락가락하는 봄날씨처럼 갈팡질팡 변하는 그녀의 마음을 붙잡으려 부단히도 노력하는 마틴. 50년 동안 어떻게 숨기며 살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처음엔 죄라 생각해서 숨겼지. 그러다 나중엔 감추는게 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이라 말한다. 결국 이 두 사람이 마주한 진실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다. 그녀가 勞役했던 로스크레아 수녀원에서 돈을 받고 아들을 입양한 것이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아일랜드 강제입양사건을 정면에서 다뤘다. 아일랜드는 건국 초기 궁핍한 경제를 탈피하기 위해, 당시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들을 세계 각국에 돈을 받고 수출하는 정책을 펼쳤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아픈 역사가 있다. 아일랜드의 1만여 미혼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어디로 입양 됐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이를 평생 찾지 않는다’는 각서에 사인을 하고 입양을 보내야 했다. 당시 미혼모들의 나이는 평균 23세. 14, 15세의 소녀들도 수녀원, 세탁공장 등 각종 교화시설에 입소해 하루 12시간의 노동 후 한 시간 동안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필로미나의 기적」에서는 당시 입양됐던 아이들의 실제 홈비디오 장면이 삽입돼 몰입도를 높인다. 그야말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던 이곳에서는 아이가 거꾸로 나와도 진통제를 주지 않았고, 출산 시 사망하면 수도원 앞에 묻었다. 원장수녀는 말한다. “쾌락을 즐긴 죄의 댓가이니 참아라. 주께서 너의 길을 정하실 거다.”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1920년대 아일랜드 강제노역시설에서 벌어진 강제입양이다. 하지만 고고한 모습의 수녀원장을 통해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신과 신앙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은폐됐던 사건의 추악한 전말을 파악하고 수녀원장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마틴에게 수녀원장은 말한다. “난 신에게 순결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렇게 주님께 다가갔다. 이 여자들은 죄를 지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역사적 진실

우리가 사는 지구. 이곳은 신의 뜻이 이뤄지는 공간인가 아니면 신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는 공간인가. 신의 뜻을 따라 현실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악(이라 믿는 것들)을 따라 살 것인가.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악행을 합리화했으며, 또한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했던가. 한 아이와 엄마의 50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수녀를 대하는 필로미나의 태도에서 중세시대의 성녀 필로멘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1996년에야 문을 닫은 강제노역시설들. 2009년 마틴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책은 영국에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아일랜드와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지난해 2월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가 이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BBC에서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한 미혼모들이 힘을 얻어 아이를 찾아 나서게 됐다. T.S. 엘리엇이 말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모든 세상이 새로워졌다고. 필로미나의 결코 가볍지 않은 여정을 따라가는 98분이 지나고 극장을 나서는 기자에게 세상은 새로웠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한 편의 영화를 만났다. 자, 이제 당신 차례다.


윤상민 학술문화부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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