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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과학 논쟁에 대답할 차례인가
누가 이 과학 논쟁에 대답할 차례인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3.25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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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통섭과 지적 사기』 이인식 기획|김지하 외 지음|인물과사상사|264쪽|14,000원

이 책의 부제는 ‘통섭은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배신했는가’다. 근래 한국 학계에 불었던 바람 가운데 하나가 ‘통섭’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런데 이 책은 이 통섭을 두고 ‘과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지적 사기’라고 말한다. 책을 기획한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을 난도질했던 소칼(Sokal)의 寶刀를 빌려와 ‘통섭’과 그 수용자들에게 이 혐의를 입혔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그런 근거이자 비판의 무대가 된다.


이 통섭의 최초 발신자는 물론 에드워드 윌슨이다. 그의 책 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 (1998)을 놓고 이인식 소장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을 통합하자는 주장’으로 읽고 있지만, 당시 책을 번역했던 최재천 서울대 교수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고 읽어냈다. 이른바 ‘지식의 대통합’을 윌슨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재천 교수는 이 용어 ‘consilience’[(추론의 결과 등의) 부합, 일치]를 ‘함께 넘나듦(jumping together)’이라는 뜻의 라틴어 ‘consiliere’에서 가져온 것으로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統攝’이란 용어를 만든 최 교수는 이 용어에 원효의 사상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1996~2013년 논의들 한 데 묶어 ‘統攝’ 비판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노출됐다. 이인식 소장에 의하면, 일부 지식인들이 윌슨 식의 지식 통합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통섭을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남용하는 ‘범주오류(category mistake)’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시인 김지하가 한 인터넷 매체에 연재한 고정칼럼을 통해 통섭을 통렬하게 비판해 逆과학논쟁에 불을 붙였다. 그게 2008년 무렵이다. 김지하는 원효가 저술한 『大乘起信論疏』를 인용하면서 윌슨의 통합이론과 원효의 불교 사상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자 사건이다.


“동양학에 정통한 문인과 윌슨의 제자라는 번역자의 논쟁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가 한결 풍성해”질 수 있다고 보는 이인식 소장은 “통섭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어 관련 학계에서는 이 논쟁의 귀추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 번역자 쪽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아쉽긴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역과학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인문학과 과학기술 양쪽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결실이 맺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2012년 한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공표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충분히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며,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읽히는 제목을 단 이 책 『통섭과 지적 사기』에 수록된 글들은 멀게는 1996년에서, 가깝게는 2013년 사이에 발표된 것들이다. 인터넷 매체, 대학원 신문, 학술지 등 성격이 다른 곳에 발표된 글들을 ‘같은 제목’ 아래로 소환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셈이다. 일부 저자가 내용을 조금 수정, 보완하긴 했지만 이인식 소장의 에필로그 하나만이 책에 맞춰 새롭게 쓴 글이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사정까지 짚어주는 글을 덧붙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책의 전체 얼개는 제1부 지적사기 논쟁, 제2부 컨실리언스 논쟁, 제3부 통섭 논쟁으로 구성했다. 제1부에서는 마틴 가드너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의 유쾌한 장난」(1996)과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과)의 「소칼의 목마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2000, 2002)를 실었다.

이상욱 교수의 글에서부터 2부를 구성하는 박준건 부산대 교수(철학과)의 「사회생물학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2003), 박승억 숙명여대 교수의 「통섭: 포기할 수 없는 환원주의자의 꿈」(2008), 이남인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2009), 이영희 가톨릭대 교수(사회학)의 「두 문화, 사회생물학, 그리고 ‘통섭’」(2010) 등은 본격적인 학술 논문으로 논의를 좀 더 세심하게 정리했다. 이상헌 세종대 교수(교양교육원)의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2013), 논문은 아니지만 고인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의 「‘통섭’이라는 말과 그 안에 담긴 생각」(2007)도 실었다. 제3부는 강신익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지식의 대통합, ‘통섭’이면 충분할까?」(2007), 김지하 건국대 석좌교수의 「최재천·장회익 교수에게 묻는다」(2008), 김상현 전 동국대 명예교수의 「원효는 통섭을 말하지 않았다」(2008) 등이 수록됐다. 이렇게 본다면 가히 ‘통섭’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판임을 알 수 있다.


눈에 띄는 대목 몇 가지를 보자. 이남인 교수는 “정작 통섭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한다. 현재 이 개념은 불투명하고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통섭 개념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경계 허물기 작업이 학계 안팎에서 올바로 이뤄져 학문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제안 배경에는, 윌슨의 통섭 프로그램이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는 시선이 깔려 있다. 윌슨이 제시하는 통섭 프로그램은 모든 학문이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학제적 연계 프로그램이 아니며, ‘자연적 인과관계’ 또는 ‘물리적 인과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하는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는 학문들만의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에 의하면 그것은 일종의 자연과학적 제국주의 또는 생물학적 제국주의의 프로그램일 뿐이다.

지식의 대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
이상헌 교수 역시 윌슨이 하나의 근본 법칙으로서 물리주의로 환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환원주의는 과학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으며, 에반드로 아가치(Evandro Agazi)의 말처럼 참된 과학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등장과 더불어 거시적 대상에 대해 타당한 법칙이 미시적 대상에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환원주의는 신뢰를 받기 어려워졌다.” 강신익 교수의 지적도 경청할 만한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모순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적 반성을 거친 과학, 과학적 사실을 녹여낸 인문학, 그리고 그 둘의 자유로운 소통이 학문 통합의 전제 조건이다.”


다시 이인식 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그동안 학식과 사회적 지명도가 꽤 높은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통섭이 융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생뚱맞게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책의 탄생 계기가 됐음직하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2013년 봄부터 박근혜 정부의 제1 국정목표인 창조경제의 핵심 개념으로 융합이 제시되면서 통섭도 덩달아 거론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미래창조과학부와 산하 국책연구기관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통섭이 기조강연의 주제로 곧잘 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통섭은 지적 사기’라는 도발적 비판에 대해 윌슨의 저작을 번역해 한국적 맥락 속에 던져놓으려 했던 번역자가 일정한 반론을 내놓을 차례다. ‘창조경제’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관료들이 ‘통섭’을 더 통속화하기 전에 말이다. 좀 더 품격 있는 과학논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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