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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 규모 너무 키워 … 私學부터 반성해야”
“대학들 규모 너무 키워 … 私學부터 반성해야”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3.25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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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서 ‘세계’로 눈돌리는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


▲ ⓒ최익현

대담: 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
일시·장소: 2014년 3월 18일 단국대 이사장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세계 각 나라가 자기 민족을 내세우다보면, 문화는 국경을 초월해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민족주의 안에 머물게 되면 나라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인을 길러내기 위해 넬슨 만델라에 주목했습니다.


▲ ⓒ최익현

이제 ‘민족’에 뿌리 내리고 ‘세계’를 응시하는 세계인을 길러내야 할 때입니다. 단국대가 그런 변화를 시작할 것입니다.”


1932년 중국 텐진(天津)에서 태어난 中齋 張忠植 학교법인 단국대학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장 이사장은 1967년 단국대 총장을 시작으로 단국대 역사를 갱신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최전선에 서 있었다.

1993년 8월 총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단국대 이사장직을 맡아 학교를 도왔다. 이 시기 장 이사장은 제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단 단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아카데미 외부의 일에도 깊이 참여했지만, ‘장충식’이란 이름 석자를 역사에 새긴 것은 30대 시절 시작한 16권짜리 『漢韓大辭典』 완간이었다. 그는 민족문화유산의 계승이란 문화사적 과업을 홀로 묵묵히 수행했다. 우리나이로 올해 여든 셋. 그의 말투는 또박또박했고, 사건이나 人名도 정확하게 기억했으며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단국대 이사장직을 다시 맡은 그는 ‘민족’을 절대 기초로 출발한 단국대에 ‘세계’를 도입하는 새로운 일에 착수해 요즘 무척 분부하다. 넬슨 만델라를 연구해 그와 같은 세계인을 길러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틈틈이 짬을 내 성악 독주회도 하고, 2년 전 발표한 대하소설에 이어 또 다른 소설과 시나리오도 구상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이북에서 내려온 이들을 돕고 있다. 산수유가 노란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한 3월 18일, 단국대 이사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좋습니다.”

△ 2012년 말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해냄 刊소)를 발표하셨지요? ‘민족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 조서 청년과 일본 여인을 통해 바라본 시대의 자화상’을 담은 소설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엔 성악 독주회도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바이올린은 어려서부터 했어요. 월남할 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던 분이 계셨어요. 서울대 사범대 진학해서는 럭비선수로 발탁되는 바람에 음악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한 뒤에는 또 이런 저런 일로, 대학 총장이 되면서 음악 활동할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죠. 더 늦기 전에 음악을 해야겠다 생각하고는 플루트도 하고… 연주회를 하면 주로 지휘를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는 아코디언으로 탈북자를 위해 연주하곤 하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아코디언을 잘 하거든요. 교회 전도도 하는 셈입니다.

△ 저는 6·25세대입니다. 선배들이나 후배들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척박한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이 좋으냐의 문제인데 이른바 사회지도층은 좋은 인성을 계발하기 위해 예술을 하거나,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골프를 하지 않아요. 자기 돈 갖고 해야 하는 운동인데 그게 요즘은 남의 돈으로 하는 거라 건전하지 못하죠. 물론 요새는 대중화가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음악은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요. 저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음악, 예술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다양한 현실 상황을 시나리오를 통해 담아보려는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 부친으로부터 대학 운용과 관련해 뼛속 깊이 새겨들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희 아버님 생각은 장사꾼이 대학을 운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을 봐라, 사립대가 많지만 그 대학 출신이 대학을 운영하지 기업이 대학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메이지대, 와세다대 등 훌륭한 사상가들에 의해 대학이 만들어지고 운영됐다. 이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기업이 관여하는 대학이 많지 않습니까? 선친께서는 너도 내 정신을 이어받아서 민족 독립 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대학의 정신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하셨어요. 장차 남북통일 위해서도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교명도 절대 바꾸지 말라, 어느 정도 학교가 부흥하면 이 학교 졸업생들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고, 그게 저의 대학관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최익현

△ 어려운 시기 남북회담의 물꼬를 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남북단일팀 결성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무수히 많은 남북 실무 접촉이 스위스, 홍콩, 도쿄, 판문점 등에서 열렸지만, 제가 필름을 통해 본 봐로는, 다 싸움으로 끝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실향민의 입장에서 예전의 ‘경평 축구’ 전통을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노 대통령께 ‘내게 재량권을 줘야한다. 내가 대학 총장이니, 회담 문화를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체육회담 한국 수석대표(1989),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 단장(1991, 포르투갈) 등을 역임하게 된 거죠. 이런 경험이 김대중 정부 시절 제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단 단장(2000), 대한적십사자 총재(2000)를 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적집자사 총재직에서 1년도 안 돼 물러나셨더군요.
“적십자 총재를 그만한 이유가 우선 노조 설립 문제와 관계있습니다. 전임 총재 때 노조가 결성됐는데, ‘적십자’라는 곳은 어려운 이들 도와주는 자선적인 인도주의적 사업을 하는 곳이잖아요? 국민들이 회비내고 헌혈한 것으로 사업을 하는 곳인데, 어떻게 이익단체인 노동조합이 있느냐, 그래서 전 회원들에게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노조를 해체하라고 했죠. 당시 여섯 개의 병원이 모두 적자 상태였고, 노조원의 인건비 인상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우선 저는 제 봉급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관용차도 안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이러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죠. 국회의원들도 눈치를 주더군요. 한 발 물러서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노(N0),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만두면 그만뒀지, 이렇게 적십자 총재직을 할 수는 없다, 하고 맞섰던 거죠. 평양 다녀온 뒤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를 남북 실무자들이 문제 삼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요지는 적십자사가 왜 북한을 도와줘야 하냐는 것이었어요. 전기 사정도 나쁘고, 의약품도 태부족인 북한 사정을 언급했는데, 북에서는 왜 자신들을 욕하냐 이렇게 나오더군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적십자 총재직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 아까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아 뭐냐면 제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주로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된 것들인데요, 이를테면 종교 문제 같은 것도 포함됩니다. 교회 나가보면 목사님들의 삶의 원리가 뭐냐, 과연 저분들이 성경에 입각해서 십계명에 바탕을 두고 설교하는 건지… 저도 교회 다니고 있지만, 교회 다니면서도 문득문득 회의가 많이 듭니다. 그걸 직접적으로 쓸 수 없으니 연극 식으로 써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공부한 거죠. 우리 사회에는 광신적인 종교인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문제를 다루고 싶은데, 그걸 직접적으로 다 말하기 어려우니까, 연극이나 공연을 통해 모순을 드러내보이자, 이런 생각인 거죠. 시나리오 소재는 참 많습니다.”

△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후원한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사고로 두 팔을 잃고 발로 그림을 그리는 어린 여학생 이야기를 알게 됐습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데, 전문가가 아니면 화가로 성장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겠냐 해서 얘를 유명한 화가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생활비를 보내주면서 지원했어요. 이 친구가 얼마 뒤 홍익대가 개최한 전국 미술고교생 실기대회에서 금상인가를 수상했어요. 그래서 홍익대 미대를 가겠다고 하는 걸 겨우 설득해서 단국대로 진학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때 그의 언니가 돌봐주고 있었는데, 홍대를 가면 언니 생활은 어떻게 되겠냐, 단국대에서 언니까지 책임지겠다고 설득한 거죠. 그 친구는 지금 단국대 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근데 아직 결혼을 못했어요. 신랑을 구해줘야 하는데…”

△ 대하소설이 많이 팔렸다고 들었습니다.
“제 주변에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저의 비서들은 거의 다 ‘알바’로 비서 일을 합니다. 공부도 다들 열심히 합니다. 작년에 대하소설로 1억 정도를 벌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제자들이나 지인들이 많이 팔아줬기 때문이죠. 하하하. 지금 박원순 서울 시장도 제 아들의 경기 동창입니다. 어려울 때 아들 친구라 많이 도와줬습니다. 나중에 주례도 제가 섰고요. 그런 인연으로 아름다운 가게 할 때 식구들이 모두 팔을 걷고 도왔습니다. 가치 있는 사회사업이잖아요. 남을 돕는 일이고요. 이런 이야기를 다 하려면 며칠 걸려도 다 못할 걸요?”

△ 말씀 속에 휴머니티가 가득합니다. 주제를 바꿔 대학 문제를 여쭤보겠습니다. 대학 총장, 이사장 등 대학 경륜이 깊으신데, 지금 한국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 등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구조조정 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운영해본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린다면, 국립대도 마찬가지지만 대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서 대학의 규모를 지나치게 크게 잡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규모로 국민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데, 너나할 것 없이 백화점식 대학으로 변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정부나 기업이 대학을 별로 도와주지 못해서, 학생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작용합니다. 대학의 규모가 크다보니 그 수를 채우기 위해서 연구능력이 부족한 사람들까지 수용했는데, 이제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문민정부’ 시절 일시에 40여개의 대학을 신설하는 초유의 일도 빚어졌고,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에 대학을 만들어주고… 중국학생들 막 받아들여주니 들어와서는 돈 벌러 빠져나가고…. 일차적으로는 사학이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두 캠퍼스가 있지만 작년에 구조조정해서 이중 학과는 없지만, 저희 단국대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학생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인데, 정부가 줄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대학부터, 우리부터 먼저 스스로 줄일 것은 줄여가는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거죠. 이제는 대학운영자가 현실에 맞게끔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저희도 비상이 걸렸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해서 정부와 같이 보조를 맞춰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스스로 노력하는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것에 안주할 수 없거든요. 금년에도 예산 10프로 줄이자고 제안했습니다. 대학에서 쓰는, 전기, 수도 등 아껴 쓰자는 거죠. 봉투 하나 허투루 버리지 말자, 학생 등록금으로 커피 마시지 말자, 이렇게요. 학장님들이 제 방에 찾아오시는데, 저는 물 내놓지 커피는 내놓지 않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보자는 거죠. 학교차 대신 제 개인차로 업무 봅니다.”

△ 이사장직은 두 번째 다시 맡은 걸로 압니다. 과거와 어떤 변화가 있는지요.
“저처럼 오래 대학 현장에 있는 분은 지금 드문 것 같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나갑니다. 월급도 500을 줄였어요. 거기서 또 100만원은 장학금으로 내놨습니다. 12명의 학생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제가 받는 돈은 250만원입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많은 편이죠? 골프 안친지 이십년이 됐습니다. 저녁때 손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죠. 여행도 가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학교 돈이 지출되기 때문입니다. 가면 제 사비를 들여가면 됩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좀 제한해야 합니다. 해외여행 안 가고, 술 안 먹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장학금 받고 졸업한 선배들에게 후배들 위해 이제 너희가 장학금 내놔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죠.”

△ 이사장님이 30대였을 때 결심했던 사업 하나가 큰 결실을 거둔 게 있습니다. 31년 걸려 완성한 『漢韓大辭典』 사업인데요, 어떤 동기가 있었나요?
“제가 고려대에서 중국사를 전공해 석사 논문을 쓸 때 관련 서적들을 보면 특수한 용어들이 많았습니다. 중국, 일본 사전 보면서 공부하는 게 참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은사이신 정재각 선생님께 ‘과거 일본에 우리가 문화를 전달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우리가 일본 것을 보고 공부하니 참 가슴 아픕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작은 사전이 아니다보니 돈도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고, 인력도 엄청나게 필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총장하면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을 모셔오고, 각계 원로 선생님들을 모셔서 그분들 이름으로 사전 작업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발표하면 반대할 게 뻔했으니까요. 후임 총장들께도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중재(장충식 이사장의 호)가 죽어도 이 사전은 완성해야 한다는 약속이었어요. 그래서 31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정부에 들어가지 않고, 대학에 머무르고 있어야 완성할 수 있었던 사업이었습니다. 정부나, 기업들로부터 지원받지 않고 단국대 자력으로 완성했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전이 출간 된 뒤 어느 날 중국쪽 인사가 제게 불쑥 이렇게 말했던 걸 아직도 기억합니다. ‘사전이 출간됐는데 왜 한국 사회가 조용하냐,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참 좁은 것 같다.’ 물론 더 큰 대학들이 했더라면 요란했겠지요. 씁쓸한 대목입니다. 재미난 것은, 단국대가 동양 최대의 『한한대사전』을 내놓자, 이게 대만과 중국을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도 8개 대학이 합쳐서 20년 걸려 만든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만 한자 수는 우리 사전보다 적더군요. 하버드대, 베이징대 등 세계 유수 대학 도서관에 단국대가 만든 사전이 비치돼 있습니다. 가히 한국 대학을 대표하는 사전이라고 자부합니다.”

▲ ⓒ최익현
△ 근래 이사장님께서는 ‘민족’에서 ‘세계’ 즉, 지향점이 인류 공영의 가치로 눈을 돌리고 계신 것 같더군요.
“우리 대학 역사를 보면 민족주의가 그 기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광복 직후라 민족과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21세기인 지금, ‘민족’에만 눈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 각 나라가 자기 민족을 내세우다보면, 문화는 국경을 초월해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민족주의 안에 머물게 되면, 나라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自主, 民族과 같은 가치를 바탕으로 한 창학 이념만으로는 세계적인 사람을 키워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롤 모델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인종 탄압과 온갖 차별과 박해를 극복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백인이 만든 세상, 백인이 만든 체제, 백인이 만든 감옥에서 수십 년을 옥살이 했지만, 복권된 이후 정적들을 모두 용서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똘레랑스’의 정신을 보여준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지금 만델라 대통령을 위한 연구소를 단국대에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사상은 무엇인가 등을 연구해서 새로운 세계인을 길러내는 데 활용할 계획입니다. 동서를 잇고 아프리카를 잇는 생각에 만델라 대통령을 기념하는 종합예술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세계문화의 공통적인 광장을 만들겠다는 것이죠. 이사회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도 반대하지 않더군요. 과거에는 그렇게 많이 반대했는데 말입니다. 2020년 완성을 목표로 한 일인데, 글쎄 제게 그때까지 시간이 허락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웃음)”

-건강하고 이타적인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마 그 일도 완성을 보실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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