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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열차가 만든 고난과 희망의 교차로
산업화 열차가 만든 고난과 희망의 교차로
  • 박규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4.03.11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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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40_ 구로공단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 평화시장,
구로공단

▲ 가리봉 거리에 들어선디지털단지. 그 속의 한 빌딩 옥상에서 바라본 옛 구로공단 흔적들. 섬유공장들이 있던 곳은 이제 거대한 빌딩숲으로 바뀌었다 공단 너머 안양천 물길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최익현


1990년대 이후 구로공단의 쇠퇴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조성에 의해 벌집의 주인은 미혼의 여성노동자로부터

가난한 도시 주변인과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었다.
‘구로공단(공식명칭, 한국수출산업공단)’은 1960~70년대 가난한 농촌의 가정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 구로공단에 정착한 수많은 젊은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족의 생계 혹은 동생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거창한 ‘수출 역군’이 되기 위해 열악하고 통제된 노동 환경 속에서 청춘을 받쳐 힘들게 일했고, 또한 부당한 노동 조건과 해고에 맞서 싸운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회는 양적·질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출지향적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서 고급기술과 생산자서비스(금융, 법률, 지식·정보, 광고)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에 구로공단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한 것에서 감지할 수 있다.

가난한 도시 주변인과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었다. ‘구로공단(공식명칭, 한국수출산업공단)’은 1960~70년대 가난한 농촌의 가정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 구로공단에 정착한 수많은 젊은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족의 생계 혹은 동생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거창한 ‘수출 역군’이 되기 위해 열악하고 통제된 노동 환경 속에서 청춘을 받쳐 힘들게 일했고, 또한 부당한 노동 조건과 해고에 맞서 싸운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회는 양적·질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출지향적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에서 고급기술과 생산자서비스(금융, 법률, 지식·정보, 광고)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에 구로공단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한 것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구성하는 기업들은 기술, 자본, 상품, 임금, 고용 등의 측면에서 복잡하고 다양해 졌지만 도시 하층민, 주부, (불법)외국인노동자들은 여전히 저임금, 비정규직, 불법고용 등의 열악한 노동 환경 하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구로공단의 여성노동자들과 같이 한국경제 발전과 소비문화를 지탱해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주변화(부재화)된 사람들이다.

구로공단의 형성과 재편
1960년대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된 구로공단은 20세기 초반이후 전개된 영등포 지역의 변화, 특히 철도와 공장지대 형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 한양(도성)의 외곽이며, 한강과 안양천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지대에 위치한 영등포는 경인선과 경부선이 건설됨에 따라 無名의 농촌(혹은 강촌)에서 서울과 인천·부산을 잇는 근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됐는데, 이곳에 일본의 대기업들이 입지함으로써 공장지대로 변모했다. 특히 구로공단의 중심 산업인 섬유업의 경우, 1930년대 영등포에 진출한 일본의 거대 방적공장인 종연방적, 동양방적, 대일본방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제정된 도시계획령에 의해 영등포는 잠재력이 풍부한 공업지대로 지정됐지만, 영등포 공장지대의 많은 공장들은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자본과 기술 부족에 의해 방치되고 대규모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이후 영등포 공업지대는 수출주도형 국가공단인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부활하게 됐다.

구로공단은 재일교포 기업을 유치해 수출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성된 계획 공간이다. 공단은 세 개의 단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시차를 두고 건설됐으며,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업체들이 차례로 입주했다. 한국공단연구소 자료(1987년)에 의하면, 제1단지(1965~1967년)의 업체 수는 54개(평균종업원수 324.2명)이고, 제 2단지(1967~1968년)의 업체 수는 58개(평균종업원수 260.6명)이며, 제3단지(1970~1973년)의 업체 수는 158개(평균종업원수 234.3명)이었다. 구로공단의 점진적 확장과 활성화로 인해 구로동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영등포구에 포함됐던 구로동은 1980년 4월에 구로구로 승격됐다. 1990년대 구로공단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재구조화 전략으로 2000년 12월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변경됐고, 아파트형공장의 설립이 가능하게 됐다. 오늘날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이 완전히 桑田碧海의 공간으로 뒤바뀌게 된 전환점이었다.


수출지향적 국가공업단지로 출발한 구로공단의 노동자수는 제1단지가 조성된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1987년에 7만3천195명을 기록했으며, 중심 업종은 섬유봉제와 전기전자였다. 1980년대 후반이후 노동쟁의, 임금상승, 도시재개발, 저가 수출상품의 국제경쟁 심화 등으로 구로공단의 기업들이 지대와 임금이 저렴한 지방 혹은 해외로 이전함에 따라 노동자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1999년에 2만9천639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조성된 뒤 아파트형공장이 대규모 건립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소규모 업체들이 입주하게 됨에 따라 노동자수는 급속히 증가해 2011년에 14만2천280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외형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1970~80년대 ‘공순이, 공돌이’로 호명된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먼지·소음·악취 등의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비인격적 대우를 받으면서 가족의 생존, 기업의 이윤,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괄목할만한 성장 배경에는 이들의 숨은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바다.


한국수출산업공단 자료(1981년)에 의하면, 구로공단의 노동자 5만8천61명 가운데 남녀 성비는 여성 65.3%, 남성 34.7%이었고, 이 가운데 남성노동자의 55.4%가 미혼인 반면에 여성노동자의 89.8%가 미혼이었다. 특히 젊은 노동자(25세 이하)의 경우, 여성은 78.5%, 남성은 47.6%를 차지했다. 즉, 수많은 젊은 ‘미혼의 여성 노동자’의 삶과 노동, 헌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미혼 여성 노동자가 섬유봉제업 혹은 전기전자의 조립가공업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결과로 기업은 이윤을 남겨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60년대 말 제1단지에 설립된 한 어패럴 기업은 2천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다양한 의류제품을 생산·판매해 25억(1983년)과 36억(1984년)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공단노동자의 고단한 노동과 삶
구로공단의 발전 동력이 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노력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기업과 국가의 착취와 억압(탄압)에 순종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벗어나 노동과정에서 겪은 피해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투쟁을 전개하면서 주체적 노동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한 예가 1985년 6월에 일어난 구로동맹파업이었다. 이 파업을 분석한 연구자(유경순, 역사학연구소)에 의하면, 구로동맹파업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5개 노조, 노동운동단체, 민중운동세력이 연대한 투쟁이었고, 민주주의 사회 건설에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됐다.


그러나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지정된 이후 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구성의 특이성 때문에 1980년대와 같은 노동운동의 조직화, 운동화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소규모 영세(하청) 기업들이 비정규직, 파견, 주부, (불법)외국인 노동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비대칭성’ 때문이다. ‘디지털단지’로 변한 구로공단에서 과거의 노동조합 결성과 연대투쟁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1970년대 구로공단의 젊은 노동자들은 감시와 규율의 시선이 항상 작용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거나 공단주변에 싼 임대료의 열악한 주거지에 살아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먹고 자고 하던 ‘벌집(쪽방)’은 구로동의 상징이었다. 부엌 하나 딸린 작은 방들은 가난한 젊은 노동자들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었다. 1990년대 이후 구로공단의 쇠퇴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의 재생에 의해 벌집의 주인은 미혼의 여성노동자로부터 가난한 도시 주변인과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었다. 현재 구로공단 지역은 디지털산업단지, 열악한 임대주택, 중산층 아파트, 최신식 백화점, 화려한 오락 시설, 외국인 상가 등이 혼재해 있는 복합공간이 됐다. 따라서 구로공단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다양한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박규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하와이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사회·경제지리학을 전공했다. 최근에는 다문화공간, 정치생태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논문으로 「관계적 공간에서 결혼 이주 여성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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