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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천문 관측을 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천문 관측을 했을까?
  •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천문학
  • 승인 2014.03.10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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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우리 혜성 이야기』 안상현 지음|사이언스북스|319쪽|18,000원


▲ 안국빈의 핼리 혜성 관측 기록이 담겨 있는 『성변등록』.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에 소장돼 있다.
혜성의 본체는 에베레스트산 만한 얼음과 드라이아이스의 덩어리에 먼지티끌과 탄화물 등이 약간 가미돼 있는 태양계 내의 소천체다. 그러나 이것이 해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표면에서 승화가 일어나 거기서 나온 가스가 수십만 킬로미터의 코마와 천만 킬로미터 길이의 꼬리를 이루게 되니, 태양계 안의 어느 천체보다도 커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늘에 나타난 대혜성들은 그 겉보기 크기가 일상적인 천체들을 초월하므로, 전근대 시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 기근, 전염병, 화재 등과 같은 재앙의 전조로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필자의 『우리 혜성 이야기』는 이러한 혜성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와 과학의 역사를 인문학으로 풀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여기에 쓰고자 하는 글에서는 필자가 이 책의 행간에 적어 놓은 생각을 약간 말씀드리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日者 또는 日官이라 불리던 천문학자들이 있었고, 특히 백제에는 역법 계산을 맡았던 曆博士가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天文博士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사천대, 사천감, 태사국 등의 천문 관측을 맡은 관청이 있었다. 이 관청들이 1308년에 書雲觀으로 통합된 다음, 세조 때 觀象監으로 개칭됐으며, 1907년 일제에 의해 철폐되기까지 약 600년 동안 존속했다. 일제 강점기에 잠시 명맥이 끊겼다가, 해방 후에는 국립천문대와 그 후신인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문관측, 일제강점기때 명맥 끊기기도
조선시대의 관상감에 근무하던 천문학자들은 조를 편성해 낮과 밤으로 교대 근무를 하면서 천문과 기상을 관측했다. 이들이 작성한 관측일지는 날마다 국왕, 왕세자, 정승, 승정원 등에 날마다 제출됐다. 또한 6개월마다 관측 일지를 베껴서 『천변초출』 또는 『천변초출기』라는 자료집이 편찬됐고, 또한 그 해의 주요 천문 현상은 따로 베껴서 현상별로 『천변등록』을 작성했다.


이러한 관측 보고서들은 승정원에 제출돼 『승정원일기』에 실리고, 나중에 국왕이 승하한 후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할 때 그 안에 요약돼 실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많은 천문 관측 기록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쳐, 그 관측 일지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도 우리 선조들의 꾸준한 천문 관측과 철저한 기록 정신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이러한 활발한 천문 관측은 기본적으로 별점을 쳐서 국가의 운명을 미리 알려는 욕구에서 이뤄졌고, 또한 유교적 왕도정치의 일부로서 왕권의 상징인 정밀한 책력의 제작도 중요한 필요성이 됐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지극히 실용적이라서, 일단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비실용적으로 인식되는 과학적 연구는 이어지지 못했다. 또한 국가가 주도하는 천문학의 한계, 인쇄술과 출판 유통 체계의 낙후성, 종교 탄압, 유럽과 직접 소통하지 못한 점 등이 조선에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못한 이유들이다.


서양 천문학의 조선 전래는, 1603년에 세계지도가 수입된 것을 필두로, 이수광이 새로운 지식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1631년 정두원은 몇 부의 한역서양서와 천리경 및 자명종과 같은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그 후 주로 시헌력의 도입과 관련해 청나라로부터 많은 천문서와 수학서 등이 도입됐다. 『영대의상지』나 『수리정온』 등은 지식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대표적인 책들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이러한 과학서적들은 주로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활약하던 카톨릭 예수회 소속의 신부들이 작성한 것들인데, 로마 교황청의 정책상 태양중심설(지동설)의 중국 유포가 금지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과학서적들에 최신의 과학적 정보가 담기지 못하게 됐다.


중국에 태양중심설이 소개된 것은 1760년에 예수회 신부인 미셸 베노아의 『곤여전도』의 해설문을 1767년에 錢大昕이라는 중국인 학자가 『지구도설』이라는 책으로 간행한 것이 최초다. 이 『지구도설』이 조선에 수입돼, 1800년대 중반에 가서야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의 『井觀篇』이나 혜강 최한기의 『地球典要』에 인용됐다.


이에 비해 일본은 네덜란드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통역사들이 많이 양성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蘭學’이 성행했다. 1771년에 네덜란드어 통역사였던 모토키 요시나가의 『화란지구도설』이라는 책을 통해 태양중심설이 일본에 처음 전해졌고, 1800년경에는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의 행성 운동의 법칙, 원심력, 광학 등이 알려졌다. 이러한 근대 천문학 지식은 1867년에야 조선의 혜강 최한기에 의해 『星氣運化』란 책을 통해 전해졌지만, 그 도입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과학적 사고와 공리 체계
필자는 과학적 사고에서 공리 체계가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과학사에서 공리체계가 최초로 적용된 것은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이다. 이 책은 1607년에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에 의해 절반 정도만 중국어로 번역됐다. 그 후 청나라의 강희제가 예수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만주어로 『기하원본』을 강의하게 했는데,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은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강희제의 스승인 페르비스트는 프랑스 사람인 파르디가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재구성해 서술한 『기하학의 요소』라는 책으로 강희제를 가르쳤다.


이 책들은 나중에 총 7권으로 만주문자로 간행됐고, 후에 중국어로 번역돼 『수리정온』에 실렸다. 이 『수리정온』에 실린 『기하원본』은 공리체계로 기술됐다기보다는 구체적인 문제 풀이 중심의 책이었다. 조선의 18세기에 불었던 수학 공부 바람은 요즘 한국 과학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조선 후기의 수학광들은 마테오 리치의 泰西 『기하원본』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주로 『수리정온』에 실려 있는 파르디의 참고서를 공부한 것으로 보이므로, 조선의 학자들은 과학적 사고의 요체요 과학의 언어인 공리체계를 별로 접하지 못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의 ‘과학’은 따로 언급되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과학과 기술’이라고 언급된다. 또한 ‘과학’은 최첨단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순수 과학’ 또는 ‘기초 과학’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냈으나, 여전히 한국 사회의 과학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필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성 위주의 과학관’과 ‘과학의 국가 독점’과 ‘공리체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그러한 과학적 마인드 부재의 원인으로 들고 싶다. 앞으로 과학 정책과 교육 부문에서 이 점에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천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고등과학원 펠로우를 거쳐, 현재 한국천문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천체물리학, 우주론, 역사천문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국내외에 약 50편의 논문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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