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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개념 인식차 확인 … 본격 삼국 연구자연대 시작됐다
‘위안부’ 개념 인식차 확인 … 본격 삼국 연구자연대 시작됐다
  •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한국&
  • 승인 2014.03.06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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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국제학술대회_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한·중·일 학계 시선

지난달 8일부터 이틀간 중국 상하이사범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공유와 연대’를 주제로 한·중·일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소장 구태훈, 사학과)와 상하이사범대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국내에서는‘위안부’문제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았던 윤명숙 연구원을 비롯해 법학자, 역사학자 등 관련 전문가 12명이 참가했다. 중국 측은 20년 이상 ‘위안부’ 문제를 다뤄왔던 샹하이사범대 수지량(蘇智良)·천리페이(陳麗菲)교수, 중국 제2역사당안관(문서보관소) 부관장 등 관련 전문가 12명이, 일본 측에서는 일본군 최초의 ‘위안소’를 발굴한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 교수를 비롯해 3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그 외에 대학원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자료 발굴 노력의 결실

한·중·일의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위안부’문제에 대해 논의한 학술회의는 이전에도 더러 있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로 모인 것은 처음이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중국 측 연구자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과 중국 당안관 관계자들이 참석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대일 과거사 문제는 가급적 언급을 회피하고, 대중들의 반일감정을 억누르는 정책을 견지해왔다. 최근 영토분쟁을 매개로 격화된 중일간의 동아시아 패권경쟁은 그 같은 중국의 정책을 바꿔 놓았다. 이번 회의에 당안관 관계자, 북경사회과학원 고위급 인사, 상하이사범대 학장 등이 참여한 사실은 중국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중국의 정책변화는 “일본군과 관련된 문서는 발견되는 대로 적극 공개하겠다”는 제2역사당안관 부관장의 공언에서도 잘 나타났다. 중국 제2역사당안관은 난징시에 소재하는 것으로 난징시당안관과는 별개로 일본군 관련 문서를 포함한 국민당정부 이후 시기의 근현대 문서를 모아놓은 곳이다. 물론 동북지역이나 다른 문서보관소에도 일본군 관련 문서들이 보관돼 있지만, 이곳은 아직 정리조차 덜 된 문서들이 대량으로 보관돼 있다. 그 동안 관련 문서들이 거의 공개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자료들이 대거 발굴될 가능성이 큰 곳으로 연구자들의 기대를 모으는 곳이다. 최근 자료의 부재를 들어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나선 아베정권의 도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자료가 중국에서 발굴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물론 아베정권의 억지는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인정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이고,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관련 연구를 깡그리 무시하는 정치적인 공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 직‘위안부’와 ‘위안소’제도에 관한 전모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번의 학술회의는 그 같은 자료 발굴 노력에서 시작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는 2012년 11월부터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해‘위안부’관련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국내의 ‘국가기록원’자료를 전수조사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에는 상하이와 난징의 당안관 자료를 조사했다. 자료조사 결과 중요한 새 자료들이 발굴됐고, 그것을 한·중·일 연구자들이 공유하고, 자료 발굴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도 이 같은 사실에 공감해 공동 학술회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회의에서는 한국 측 발굴 자료들이 소개됐다. 필자는 국가기록원 자료조사 결과 일본이 패망 직전 문서를 조직적으로 파기해 버려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문제와 가장 관련이 깊은 외무와 경무 관련 자료가 단 한 건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또한 ‘전시물자절약’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이미 1943년부터 중요자료를 제외한 모든 문서의 폐기를 지시하는 문서가 읍면 단위의 관공서와 일선학교에까지 보내지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미성년자를 만주의 위안소로 팔아넘기려던 자들에 대한 재판기록과 ‘처녀공출’소문을 낸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과 관련된 자료 등도 발표됐다.

한혜인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일본근대사)은 중국에서 발굴한 자료를 소개했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자료는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괴뢰정부를 내세워 위안소를 세워나가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이 자료에는 위안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일본헌병대 및 육군경비대 등 일본군의 허가와 조계지 행정을 지도하는 일본 지도관공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허가를 위해 제출된‘위안부’명부에는 15세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 군인이 직접 위안부를 고용한 경우도 발견됐다. 회의에서는 1939년 12월 일본군 특무기관 소속의 이케다(池田)라는 자가 직접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위안소를 조직했다는 보고문건이 소개됐다. 이 같은 내용은 중국인 부녀자의 강제연행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향후 직접적인 강제연행 상황을 담은 문서의 발굴 가능성도 보여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이밖에 회의에서는 한국의‘위안부’관련 자료정리 현황, 중국 측 연구와 자료현황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또 ‘위안부’실태와 관련해 난징시 당안관 자료를 활용한 중국 측 실태보고와 천진시 당안관 문서를 활용한 일본 측의 보고가 있었다. 중국 각지의‘위안부’피해 조사결과와 새로 찾은 위안소가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 측에서는 일본군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구성한 영상물을 상영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모색도 이뤄졌다. 한국 측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국가의 법적 책임문제와‘국민기금’운영의 실태와 그 문제점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종합적인 토론이 진행됐다.

침묵하는 일본 언론

이틀간의 회의에서는‘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료발굴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번 회의를 기회로 연구자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중국 당안관에 대한 공동조사를 진행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물론 회의에서는 서로의 차이점도 확인됐다. 한·중·일 연구자들이 규정하는 ‘위안부’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이 자칫 국가주의로 함몰될 위험이 있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 같은 공감과 차이에 대한 확인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일 연구자네트워크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번 회의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반면 일본의 언론은 침묵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이 만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본격적인 연구자연대가 시작됐다는 데 이번 회의의 의의가 있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한국현대사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국가 간 역사 갈등 해결을 위한 역사정책 모색-한일 간 역사분쟁의 포괄적 해결방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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