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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학문 벗어나 새 길 내는 시도는 계속된다
절름발이 학문 벗어나 새 길 내는 시도는 계속된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2.10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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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학제 패러다임-독립연구단 1차 연구성과 집약한 총서 간행기념회

고등과학원은 지난달 27일 초학제 연구총서 간행기념회를 열었다. 이번에 발간된 두 권의 총서는 초학제 패러다임-독립연구단(책임연구원 김상환, 이하 패러다임연구단)의『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 동서 사유의 교차와 수렴』과『분류와 합류: 새로운 지식과 방법의 모색』(김상환, 박영선 엮음, 이학사 刊)이다. 이번 총서에는 패러다임연구단의 연구 주제 ‘분류-상상-창조’의 첫 단계‘분류’에 관한 2년 동안의 고민이 고스란히 축적돼 있으며, 초학제 연구단들 가운데 총서 형태의 연구 성과로도 처음이다.

총서 간행기념회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사회로 1, 2부로 나뉘어 3시간여 진행됐다. 세계적 수준에서 초학제 연구의 흐름과 현황을 되돌아보고 3년차에 접어든 초학제 프로그램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대담은 김두철 전 고등과학원장의 초학제 연구를 시작한 배경 설명으로부터 시작됐다. 김 전 원장은 “현대에 접어들며 학문 분야가 세분화되며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왜 이런 학문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성없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흘러가는 것은 학문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초학제가 탄생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정부출연연구소로서 인문학, 사회과학과 교류 없이 수학, 이론물리, 계산물리 등 순수기초과학만을 고집한다면 ‘절름발이’가 될 것이라는 비유도 덧붙였다.

김 전 원장의 말처럼 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융합이라는 좋은 취지에서 시도된 초학제 프로그램이었지만, 실제 연구를 진행했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들은 연구 중 맞닥뜨린 현실적인 벽에 대해 토로했다.

융합 연구 현장의 애로점 토로

또 다른 독립연구단인 정보-독립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이준규 서울대 교수(물리학)는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학술 용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공계 교수는 수학에 의존하고, 철학자는 입에 의존하는 데에서 상당한 괴리가 있다”며 연구 첫 해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돌아봤다. 그래서 이 교수는 정보-독립연구단의 2년차 과제를 ‘렉처노트’로 선정했다. 철학과 물리학에 가장 기본 되는 개념을 용어로 정리해 입문서로 제공해야 소통이 가능해지고, 아울러 후속세대들이 또 한 번 겪을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덜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교수는 초학제 프로그램을 위한 제언도 잊지 않았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인 만큼 정책 사업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는 “삼국시대에도 피타고라스 정리를 알았고, 천문학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동료 사학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과학사를 같이 연구하는 정책 프로젝트를 하려면 한자, 고고학 등 많은 분야가 연관된다”라고 말하며 초학제 프로그램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듬어질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철학자와 과학자의 소통 부재를 영미철학의 맥락 속에서 짚어낸 건 김혜숙 이화여대 교수(철학과)였다. 그는 2011년에 초학제 프로그램 정책연구 책임자로 일했다. 김 교수는 “논리실증주의의 실패를 정점으로 철학이 과학에 열등감을 갖게 됐다”며“이후 철학도 과학처럼 돼야 한다는 편과 철학은 인간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편으로 나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경향이 심화돼 대학 내에서도 전공이 다른 교수들간에 장벽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영국 더햄대, 독일 막스플랑크, 프린스턴의 IAS에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을 만나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 서로에게 창의적인 직관을 끌어내 놀라운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예를 제시하며 초학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융합, 소통, 초학제 등의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는 현 세태를 ‘결핍’으로 해석한 시각도 있었다. 여러 초학제 프로그램에서 발표자, 토론자로 참여해온 이용주 광주과기원 교수(문명종교학)는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해하는 동료 과학자를 예로 들었다. 이 교수는 “그를 보며 앎에 대한 투철한 의식, 지식, 방법론은 갖고 있는데 삶에 대해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교육 자체가 앎을 밀어 넣기만 할 뿐 삶을 배운 적이 없어 둘 사이의 괴리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의미에서 초학제 프로그램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번 총서의 제목에서도 쓰인 ‘합류’라는 용어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초학제 ‘올해의 연구’를 이끌었던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는 “컨버전스는 너무 공학적인 느낌이 강하고, 컨실리언스는 이 용어와 관련된 비판이 너무 많아 곡해를 일으킬 수 있는 데 반해, 컨플루언스(합류)는 메타포 자체가 자연적이며 유기적이다”라고 합류의 의미를 풀어냈다. 강이 흐르며 지류가 발생해 평야를 비옥하게 함으로 새로운 문명도 건설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무엇보다도 강제된 용어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초학제 연구단의 연구책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금까지 초학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느꼈던 단상, 어려움, 보람, 개선점을 공유하는 자리가 없었던 것을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초학제’에 쏟아진 비판과 기대

하지만 초학제 프로그램에 대해 근본적으로 제고해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플로어에서 질문한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철학과 출신으로 사학과 교수를 22년, 철학과 교수를 2년 했다. 역사와 철학이 얼마나 다른지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초학제 프로그램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초학제’라는 용어에 대해 “‘초학문’이라면 트랜스에 초월과 교류의 뜻이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초학제는 어법상으로 도 곤란하다”라고 일침했다.

이민용 불교연구원 연구원은 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학제간 연구가 그간 국내에서 이뤄지지 않은 점에 대한 학문적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초학제 연구 역시 철학자가 철학의 틀로, 과학자가 과학의 틀로 다른 분야를 보고, 그것으로 인해 가능성을 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날 총서 발간기념회는 종래 대학, 연구소 내에서‘융합’이란 이름으로 수행됐던 수많은 시도들에 비해 연속적이고 평행적이지 않으며 성과물을 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가능성을 의심하는 학계 일각의 주장에 초학제 연구단의 고민이 놓여 있다. 플로어에서 이 논의를 지켜보던 김수중 경희대 교수(철학과)의 말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경의대 한의학·철학 협동과정을 10년간 운영한 김 교수는 “용어는 잘 모르겠다. 다만, 10년이란 시간이 지나니 한의대 박사과정 논문에서 음양오행, 경락에 대한 심도 깊은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난 길은 가기도, 확장하기도 쉽지만 새로운 길을 내기는 어렵다. 초학제가 어떤 길을 낼 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때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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