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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교수 인터뷰 ] 김용구 서울대 교수와의 만남
[퇴임교수 인터뷰 ] 김용구 서울대 교수와의 만남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0.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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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3 01:41:21

“세계 외교사를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나의 책과 강의를 익명으로 비판하게 했어요. 한 15년쯤 전이던가, 한 학생이 외교사의 흐름을 단순히 서술하지 말고 외교사에 대한 나의 철학을 알려달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때 가슴이 뜨끔했지요. 내가 늘 고민하던 문제가 이것이 아니었나 하고 말입니다.”

외교사는 외교문서를 통해서 각국의 사상을 읽어내는 학문이기에 어떤 철학을 가지느냐가 평생 과제로 남았다는 김용구 서울대 명예교수. 유난히 정계 진출이 많은 학과에서 교수로 30년을 보내고 지난달 30일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게다가 석·박사 학위를 국내에서 받아, 그 이력이 오히려 보기 드물다. 지난 9일 대한출판문화협회 한 지하 카페에서 외교학자 김용구 교수를 만났다.

“왜 정계로 나가지 않았느냐고 많이 묻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실 정치에 나갈 만한 재주가 없었습니다”라며 웃으며 말하더니 “지적 호기심에 이끌려 이 분야 저 분야를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흘렀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영락없는 학자의 모습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에서 공부한 국제정치학자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와서 행태주의 이론이 풍미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해 19세기 민족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개인이 분석단위인 행태주의가 설득력이 있을 리 없지요.” 처음에는 서양정치사상에 매료돼 루소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다가 이후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 외교사를 공부했다. 한국의 현실을 보고자 하는 노력은 자연스레 그를 한국 외교사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의 지적 여정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진 것이다.

김 교수는 작년에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를 집필했다. “처음에는 유교, 이슬람, 슬라브, 그리고 유럽 문명권외교사를 다루는 ‘비교 국제관계사’(문학과지성사 간)10권을 계획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정작 중요한 한국 외교사를 쓰지 못할까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한 후 다시 한국 외교사와 관련한 두 권의 책을 더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시간도 많으니 한국외교사의 흔적이 남은 곳곳을 방문해 발로 뛰면서 살아있는 외교사를 쓰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소년처럼 환했다.

김 교수는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도 많다. “후학들에게 한국의 문제를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국 외교사에 대한 자료 연구가 없습니다. 예정된 책을 완성하면 한국 외교사 사전을 쓰고 싶습니다”라며 포부를 밝힌다. 한국외교사의 데이터베이스가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의 지적 기반이 약하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기에 계속해서 연구를 할 수밖에 없다. “서울대의 도서관 장서 수준은 세계 5백 위 정도입니다. 자료가 없는데 연구가 나올 수 없지요. 지적 기반을 확립하는 것, 이것이 학계가 풀어야할 과제일 것입니다.”

퇴임 후 아쉽지 않으냐는 물음에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제도권 교수로 있다는 것은 구속입니다.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왔지요. 예전에 선생님들께서 퇴임사를 하실 때마다 이제 진정으로 연구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국제정치 전문가로서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에 그는 단호하다. “현재 한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외교 정책은 없습니다. 다만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요. 조선시대 정조 때만 해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쳤는데 지금은 오히려 쇠퇴했습니다. 몇몇 나라에만 치중해 연구를 한 외교학계의 잘못이 큽니다”라는 말에서는 묵묵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김 교수는 젊은 기자보다도 당당한 걸음을 내딛는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남은 길을 계획하는 모습이야말로 학자의 모습이 아닐까.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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