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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나 문명은 전체주의만이 아니라 정신의 실종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문화나 문명은 전체주의만이 아니라 정신의 실종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1.27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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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문화의 안과 밖’ 시동 걸었다

‘인문적 보편주의자’로 불리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문화의 안과 밖-객관성, 가치와 정신’을 주제로 릴레이 강연의 첫 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독일 작가 한스 카로사의 시 「해지는 땅의 悲歌」를 인용하며, 지금의 한국 사회를 ‘(정신적)불행이 일상화된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는 “문화나 문명은 전쟁의 파괴나 전체주의의 싹쓸이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의 실종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정신의 파괴를 막기 위해 문화의 공적 영역을 구성해야 한다는 보다 긴 안목을 요구했다. 그의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문명과 정신의 관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신의 쇠퇴 또는 소멸이 문명의 몰락, 그리고 그 외적인 표현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과 그 물질적 표현의 몰락 또는 타락이 정신의 상실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람의 정신은 끈질긴 것이면서도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 사회 표현의 약화 그것은 바로 정신이 소멸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카로사에게 서양의 몰락, 그 정신의 몰락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파괴된 건물, 문명의 업적으로서의 도시와 도시의 건조물들의 파괴다. 카로사가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의 불꽃이 꺼졌다고 느낀 것은 그것의 외면적 표현이 파괴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런 파괴를 가져 온 것 자체가 정신의 불꽃이 꺼진 데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안과 밖은 유기적인 일체를 이룬다. 내면의 약화가 외면의 쇠퇴 또는 파괴를 가져오고, 외면의 파괴 즉 그 문화적 표현의 물적 업적들의 소멸이 내면의 소멸을 가져 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큰 외면적 번영을 누리고 있다. 다만 그간의 역사적 시련은, 사실 물질적 파괴라는 점에서보다도, 정신의 파괴라는 점에서는 전후 독일의 시련에 비슷하면서 그것을 능가한다. 그리고 지금에도 일정한 균형을 갖춘 사회 문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만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흔히 지적되듯이 소위 행복지수라는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한국의 순위가 별로 높지 않은 것은 그 한 증표라고 할 수 있다.

카로사의 정신의 불빛이 이 행복에 관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행복지수로 헤아릴 수만은 없는 어떤 정신적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보람 있는 삶이 물질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 느끼는 보람은 그 외면적 표현이 없이는 참으로 현실 속에 실현된 보람이 될 수는 없다. 인간적 삶의 구체적 실현으로서의 문화나 문명은, 전쟁의 파괴와 전체주의의 싹쓸이에 의해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의 빈곤 내지 소멸로 내면 폭발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에서 카로사의 시는 반드시 우리 상황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화는 개방적일 수도 있고 폐쇄적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말이기는 하지만, 베버의 용어를 빌려서, 문화의 ‘철갑 우리’가 된다. 단순히 문화라는 것이,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듯이 일정한 모형이며 거푸집이 되는 무늬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헤쳐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기 마련이다.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이정표도 지표도 없는 황무지에 노출되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문화의 거미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문화는 대개 국수주의적 자긍심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지상 명령으로 뒷받침되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러니는 스스로 보편성의 주장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문화라는 사실이다. ‘유럽중심주의’같은 용어는 그러한 주장이 자기과대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문화가, 유럽 문화의 관점에서든 중국문화의 관점에서든,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반드시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문화는 보편성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설사 보편성의 주장이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것을 넘어가는 보편성의 주장에 스스로를 닫지 못한다. 어떤 경우나, 보편성은, 경험적 사실의 세계에서, 보편성으로의 지향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 지향은 완전히 그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화가 보편성으로 열려 있다는 것은 결국 불확실성으로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불확실성은 궁극적으로 정신의 우주적인 열림과 그로부터 지표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허무의 의식에 이어져 있으면서, 신비에 대한 경의를 내포한다. 이렇게 얻어지는 마음의 상태는 간단히 말해 존재론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 초월자, 주변의 사물이나 생명체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집중과 조심성을 갖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전통적 유학에서 말하던 持敬을 지키고 있는 심신의 태도, 유럽의 윤리사상에서 더러 강조되는 외경감, 칸트에 있어 도덕률 앞에서 사람이 갖지 않을 수 없는 경건한 마음, 슈바이처나 한스 요나스의 ‘생명 앞에서의 외경’등이 이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윤상민 학술문화부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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