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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적 기능으로 비하됐던 ‘소비’… 역사학 새 분야 될까?
동물적 기능으로 비하됐던 ‘소비’… 역사학 새 분야 될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1.06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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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소비의 역사 공통항 모색한 설혜심 연세대 교수(사학과)

설혜심 연세대 교수(사학과)
그간 사회학, 미학, 경영학 분야에서 논의되던 ‘소비’를 역사학의 한 테마로 다루면 어떤 모습일까. 지난달 20일 열린 한국여성사학회(회장 강영경, 숙명여대) 월례발표회에서 설혜심 연세대 교수(사학과)가 발표한 논문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설 교수는「여성과 소비의 역사」에서 우선 ‘소비’ 분야가 20세기 후반까지 학계에서 어떻게 홀대받았는지 그 ‘소비사’에 주목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영향 속에서 경제사는 ‘소비’ 측면보다는 ‘생산’ 측면에서 논의됐고, 마르크스는 소비의 욕구를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품 물신숭배’로, 잘 먹고 잘 입는 욕구도 ‘동물적 기능’으로 비하했다고 말한다. 베버에 이르러 소비행위를 사회적 지위획득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소비’에 대한 인식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자본주의 발달의 추동력으로 간주하는 베버에게 있어서 소비는 곧 쾌락으로 간주됐다. 소비는 다시 주변적 위치로 밀려났다.

1960년대 미국식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학, 사회학 분야 역시 소비를 물질주의적인 이기적 도락, 혹은 무분별한 쾌락과 연결시켰다. 설 교수는 이런 풍조 속에서 노동에 대비되는 쇼핑과 같은 행위는 학문적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천박한 주제로 간주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본격적으로 소비가 역사학계에 논의된 것은 1980년대에 닐 매킨드릭, 그랜트 매크래켄 등이 이른바 ‘소비혁명’ 테제를 주창하면서다. 이들은 산업혁명과 산업화를 대량생산 측면에서만 고찰했던 서구 역사학계를 비판하며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에 ‘소비’측면에서의 팽창이 있었다는 근거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귀족들의 사치품 경쟁을 제시했다.

국내 학계에서 소비는 주로 마케팅 분야에서 다뤄지고 사회학계 일부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역사학 분야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설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또한 근대세계에서 여성이 ‘소비의 주체’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여성사 분야에서도 ‘소비’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비가 강력하게 여성성과 연계돼 논의돼 왔다는 점이 설 교수로 하여금 여성사학계의 새로운 연구지평을 열게 한 것이다.

설 교수는 ‘여성과 소비의 역사’를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했다. 첫 번째 주제는 검증적 역사학과 소비이다. 설 교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영국인이 소유한 물건을 추적한 로나 웨더릴의 연구가 분명한 젠더성을 도출해내지 못했지만 맥신 버그가 이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18세기 영국인들의 유언장 내 소유물들을 추적했던 맥신 버그는 여성들이 새로운 상품을 사는 구매자임과 동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친구관계를 강화시킨 주역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주제는 사치동물과 성적 대상이다. 설 교수는 여성과 관계된 특질로 인식되는 사치가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고 말한다. 악덕으로 규정되는 사치가 점차 안락함, 편리함, 쾌락, 사교성, 취향, 심미안과 세련미에 대한 논의로 흐르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사치와 여성의 상관관계를 보다 명확히 보기 위해 소스테인 베블렌을 소환해낸다. 이어지는 세 번째 주제는 내셔널리즘과 여성 소비자다. 설 교수는 소비의 주축인 여성들에게 ‘고급 취향을 지닌 소비자’로서 일종의 의무를 강제하는 담론이 등장한 19세기 중반에 주목했다. 여성이야말로‘문화의 담지자’이며, ‘취향의 조정자’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주제에서 설 교수는 새로운 상품이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적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의 재봉틀 판매를 여성 구매공중(Feminine buying public)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 주디스 코핀의 연구자료를 인용한다. 코핀은 고가의 물건인 재봉틀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가 광고라고 분석했다. 벨 에포크 예술의 영향으로 나른한 분위기의 요정이나 매춘부 스타일의 여성상이 전파되던 시기, 기계를 다루는 자신만만한 여성상을 보여준 재봉틀 광고가 ‘신여성’의 이미지를 고양해냈다는 것이다. 설 교수는 마지막으로 여성과 소비의 정치성에 주목하며, 소비자의 개념이 거대 기업들에게 장악된 1950년대 이후에는 여성 주도의 소비자 운동이 사적차원 혹은 비정부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앞으로 여성과 소비의 역사는 역사학의 한 분야를 차지할까? 설 교수는 여성과 소비의 역사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다채로운 주제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학파나 학설, 정교한 방법론이 나타나지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주로 영미권에서 발달시킨 소비사의 문제의식이나 분석틀을 제3세계에 적용하거나 유럽과 비유럽을 넘나드는 트랜스내셔널적 지향의 연구 움직임도 많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한편, 여성을 지나치게 적극적인 소비자로 보는 경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간을 둘러싼 행위인 소비 그리고 여성을 결합한 그의 연구가 역사학의 지평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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