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09:55 (목)
寺下村 초가집 볏짚가리에서 문득 깨달음 얻어詩人의 아내에서 삶의 敎師로 거듭나
寺下村 초가집 볏짚가리에서 문득 깨달음 얻어詩人의 아내에서 삶의 敎師로 거듭나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12.30 1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 19.짚풀문화 - 印炳善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印炳善이 짚풀에 집착한 데는 짚풀을 통해 스며든 농민대중들의 고단한 생활에 대한 각별한 정과 사랑이 자리한다. 여기에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 농촌문화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더해진다. 이 땅과 이 땅의 농민을 사랑한 남편 故 申東曄 시인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짚과 풀. 합쳐서 짚풀이다. 표기상으로는 가운데 점을 찍어야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인 만큼 그냥 짚풀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 짚풀을 우리 조상들은 각종 생활용구로 만들어 썼다. 삼태기니 동구미니 용고새 하는 것들이 그런 용구들이다. 일상생활에 쓰임새가 있는 것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자리 잡아 물려져 온다. 그것은 자연스런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짚풀은 우리의 전통 농촌문화의 하나의 원형질에 가까운 소재다. 그러나 우리가 짚풀을 짚풀문화로 여기고 받아들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그만큼 그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짚풀이 생활과 공예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 우리에게 다가서게 된 것은 前無하게 한 사람의 노력과 힘이 밑거름이 됐다. 印炳善(78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이 일에 반생을 바쳤고, 지금도 이 일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인병선이 이 일에 집착한 데는 짚풀을 통해 스며든 농민대중들의 고단한 생활에 대한 각별한 정과 사랑이 자리한다. 여기에 사라져 가는 우리 농촌문화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더해진다. 인병선의 이런 의지를 다듬고 강건케 한 중요한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더해야 그녀의 그간의 짚풀에 바친 삶에 은이 난다. 그의 남편인 故 申東曄 시인(1930~1969)이다. 신 시인은 대하서사시 「금강」 등 그의 여러 시에서 적고 있듯, 이 땅과 이 땅의 농민대중을 누구보다 사랑한 민족 시인이다. 요절한 신 시인의 못 다한 그 마음을 인병선은 짚풀에서 찾아 메웠고, 이제는 메움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기층서민의 문화유산으로 가꾸고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돋보이는 문화적 계보, 그리고 짚풀연구·수집에 바친 반평생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던 인병선은 1957년 신 시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신 시인과의 결혼생활은 고작 10여년이다. 1969년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의 생활은 말 그대로 辛酸했다. 남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위대한 시인의 아내라는 부담감,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 자녀들에 대한 뒤치다꺼리와 호구책 등 하나 만만찮은 게 없었다. 그런 와중에 벽력 같이 그녀를 파고든 것은 다름 아닌 짚이었다. 1970년대 후반경 뭔가에 이끌리듯 우리의 전통문화 연구모임인 ‘민학회’를 따라 농촌답사를 다닌 게 계기였다. 古건축물 등을 찾아 지방을 다니는데, 정작 인병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볏짚이었다.


“어느 절 밑 寺下村이었는데 일행들과 달리 내 마음을 끈 것은 옹기종기한 초가집 앞 들녘에 쌓아놓은 볏짚가리들이었지요. 주저리를 틀고 엮어놨는데, 보는 순간 저게 예술이고 농민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확 오더라구요.”
인병선이 볏짚가리 쌓아놓은 것을 보고 예술성과 함께 느낀 농민의 마음이란 바로 그게 진정한 의미의 ‘생산자의 문화’라는 것이다. 그 대척점에 농민들이 생산해주는 거 먹고 호의호식하는 수탈자들에 의한 ‘지배자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인병선의 생각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그녀는 볏짚을 보는 순간 농민대중을 사랑한 남편과 교감을 이룬 것이다. 그 때를 계기로 인병선은 짚을 보러 전국을 다닌다. 그녀의 표현대로 “짚에 미쳐서 돌아다닌 것”이 그 즈음이다 “저의 이런 행태엔 남편 신동엽의 역할도 없진 않았겠지요. 저의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아니지만 집안내력이랄까, 피가 전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있지요.” 인병선의 아버지는 저명한 사회주의 농촌경제학자인 인정식 선생으로 6·25 때 납북됐다.


그녀는 전국의 짚과 관련된 전통 용품과 장소들을 다니면서 조사와 수집을 병행했다. 그러기 위해 카메라를 별도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다 짚과 함께 농민들의 농촌생활과 떼어놓을 수 없는 풀도 함께 살펴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짚 하나로 하자 생각을 했는데, 관점을 재료에 두지 말고 전체적으로 우리 농민문화라는 차원에서 풀과 함께 짚풀문화로 엮었지요. 강원도나 제주도는 볏짚을 생산하지 않으니 풀을 재료로 쓴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인병선이 우리의 짚풀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고 연구와 수집에 노력을 기울인 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사업이 큰 자극제가 됐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그 때, 농촌마을의 확성기는 밤낮없이 ‘잘 살아보자’고 노래했다. 초가집은 농촌빈곤의 상징이라며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와 양철을 얹었다. 사랑방에서 철거덕거리던 가마니틀도 멈춰 섰다. 농민들도 대대로 사용하던 짚신, 짚 망태, 짚 삼태기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됐다. 그 자리를 뻔질거리는 비닐과 플라스틱 제품들이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농촌 발전과 현대화는 좋은데, 전통이나 농민들이 대대로 쌓아온 고유의 문화가 완전 쓰레기 취급을 당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갖는 문제가 엄청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몇 년 안 돼 전통 짚풀문화가 증거도 없이 사라지고 말겠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인병선은 무거운 카메라와 녹음기를 둘러메고 전국 방방곡곡 시골마을을 찾아다녔다. 전통 짚풀문화의 흔적과 실체, 그리고 제작기법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짚신 삼고, 가마니 짜고, 삼태기와 망태, 도롱이를 만드는 촌로들을 만나 만드는 방법과 사용법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를 사진으로 찍고 녹음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짚풀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들을 수집했다. 촌로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며 얘기를 들었고, 용품이 살림살이일 경우 돈을 지불하고 사들였다.


그렇게 답사하고 연구하고 수집한 것을 토대로 낸 책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다. 1995년 펴낸 그녀의 역저다. 이 책의 민속자료로서의 가치는 크다. 일본에서도 그것을 알아봤다. 일본의 호세이(法政)대에서 수년간에 걸쳐 우리 토속어에 대한 세심한 번역 끝에 일본어판도 나왔다.
책 출간을 준비 중이던 시기, 인병선은 짚풀문화를 보다 활성화하고 전통문화로 후대에 영원히 계승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다 ‘큰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게 바로 현재 인병선이 관장으로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www.zipul.com)이다. 1993년 사재를 들여 서울 청담동에 설립했다가 2001년 지금의 명륜동으로 자리를 옮겨 자리를 잡고 있다. 짚풀 특히 볏집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설립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한 게 이 짚풀생활사박물관이다. 1987년 ‘짚풀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짚풀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한 것은 박물관 설립의 기초공사였던 셈인데 연구회는 현재 박물관 부설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 학생들에게 여치집 만들기를 가르치는 인병선 관장.

현재 박물관은 3개의 전시실을 비롯해 한옥관과 한옥마당 등 5개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전통 짚풀문화를 체계있게 이해할 수 있게 가마니, 섬 등 곡식 담던 그릇과 나막신, 둥구미신 등 신발류, 망태기와 탈 등 짚풀로 만들어진 전통 용구가 전시되고 있으며 제작방법 이해를 위한 동영상 상영도 마련돼 있다. 이와 함께 갓. 족두리, 윤도, 놋요강 등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밀접했던 갖은 용품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는 이와 함께 청소년들이 짚풀로 직접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게 하는 50개의 창의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해 운용하고 있다. 박물관은 짚풀 관련 민속자료 3천500점, 연장 200점, 조선못 2천점, 제기 1천점, 한옥문 200세트 등을 보유하고 있다.

체험교육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에 짚풀문화 이어주고 싶은 바람
인 관장이 박물관 설립과 운영을 통해 바라는 것은 전통 짚풀문화를 널리 알리겠다는 것이지만, 이에 더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 걸 모르고 지나친다면 우리의 짚풀문화는 머지않아 그 흔적조차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 의지의 일환이다.
“우리 땅에서 나는 풀과 짚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전통적으로 쓰여 왔고 쓰이는지 알리고 싶었고, 그런 문화유산을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배우게 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이런 인 관장의 의지와 노력에 박물관에 대한 어린 청소년들의 인기는 높다. 올 들어 지금까지 5만 명의 초등·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음이 이를 대변한다. 아이들이 박물관에 오면 그냥 전시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선 안 된다는 게 인 관장의 지론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교육이다. 학교 교육과는 다른 실물체험 위주의 교육에 아이들은 환호한다. 그들로 하여금 달걀꾸러미. 연필꽂이, 만두인형, 짚뱀, 여치집, 빗자루, 조리 등을 만들어보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체험교육을 통해 인 관장은 거진 교육전문가 수준에 이른 느낌이다.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교사가 시키는 대로 잘 하지 않습니다. 자기주도형 교육으로 가야 합니다. 연장선에서 아이들이 체험교육을 통해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것을 갖고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흥미를 갖게 되고 학습효과가 높아집니다. 이러면 학생들이 자기주도형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건 일종의 교육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주도형 교육의 일환으로 인 관장이 적극 진행하고 있는 것은 ‘스마트 러닝’이다. 5~6명을 한 조로 짜 아이패드를 나눠주고 박물관 관람과 체험교육 후 그 내용들을 학생들 스스로 아이패드에 담아보게 하는 교육인데, 기발한 생각과 발상이 담겨진 내용에 깜짝 놀란다고 한다.


인 관장은 ‘한국사립박물관회’ 회장도 맡고 있다. 박물관 교육을 통해 일정 부분 우리의 교육현실을 개선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진 자리다. 박물관 운영과 함께 이런 박물관 교육 관련 일에 적극적인 것은 박물관을 통한 교육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로문제는 청소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이 진로문제에 있어서도 박물관 교육은 대단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인 관장의 생각이고 주장이다.

짚풀박물관 교육 통해 청소년들의 인문학적 소양 提高 노력
“주제가 각기 다른 전국의 200여 박물관에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진로 정보가 쌓여 있습니다. 예컨대 카메라 박물관에서는 카메라와 관련된 많은 직업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한옥 박물관에서는 한옥 전문가의 희망을 품게 되지요. 볏짚도 그렇지요. 볏짚이 조숙성, 내구성, 보온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실제로 아이들이 실험을 하도록 해요. 실험과 확인을 통해 아이들은 볏짚의 보온성 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들이 나중에 커서 건축일을 하면 볏짚을 무공해 부자재로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연계성을 심어주는 것이지요. 진로에 도움이 되지요.”


인 관장은 이와 관련해 전국 66개 박물관과 함께 체험교육을 중점으로 청소년 인문학 교육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런 관계로 인 관장은 좀처럼 한가한 시간이 없다. 그만큼 바쁘다. 특히 청소년 대상의 박물관 교육과 관련해 하는 일이 많다. 문광부 등 정부기관들과 협의도 해야 하고, 학교 사람들과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획에 관해서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도 그것이다. 박물관을 잘 꾸려 전통 짚풀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인데, 짚풀문화를 현재 실생활에 응용하는 실용화도 그 한 방안이다. 이와 함께 특히 앞으로 짚풀문화를 계승해 나가야 할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잘 해나가겠다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청소년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 풍토도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는 바람이다.


이 질문을 빠뜨릴 수 없었다. 신동엽 시인의 아내로서 신 시인에 대한 소회는 어떤 것인가.
“나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인물이지요. 다만 그가 나하고 인연이 있던 인물이라 그 양반의 뒤처리를 내가 다 한 것이지요. 애들도 다 잘 키웠고, 그 양반 문학관도 만들었고. 이런 모두가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사명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병선은 신동엽 시인의 고향인 부여에 신동엽 시인의 모든 것을 담은 ‘신동엽 문학관’을 짓고 지난 5월 개관했다. 그곳에 시인과 자신의 유품과 물품을 모두 기증했다. 인병선이 운영하는 박물관과 부속건물 등은 지난 2008년 재단을 만들어 공공의 재산으로 사회에 환원했다. 서울대 의대에서 의학교육을 전공해 그 학교 교수로 있는 장남 좌섭(55세) 씨가 시대의 ‘융복합’ 차원에 맞게 박물관을 맡아 계승키로 했다. 인병선은 아버지 신동엽 시인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들의 그런 결정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