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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일깨우는 청마의 말발굽소리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일깨우는 청마의 말발굽소리
  • 임재해 안동대ㆍ민속학
  • 승인 2013.12.30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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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갑오년 ‘말띠해’를 맞이하며

신마부. 하늘을 나는 천마 등의 신화 및 민간신앙과 결부된 상상의 동물인 신마를 내세워 악귀나 병마를 쫓는 부적이다. 조선 후기 작품. 가회박물관 소장. 그림 제공 : 국립민속박물관
갑오년은 ‘말의 해’가 아니라 ‘말띠해’이다. ‘말띠해’라는 자리매김은 마치 ‘말의 해’로서 동물을 배려하는 생태학적 시간인식처럼 생각되나, 사실은 말을 끌어들여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적 시간인식이다. 숫자로 일컫는 2014년은 선후 분별의 순차 개념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말띠해로 호명되는 연도 개념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띠게 된다. 의미 없는 연도 개념에 특정 동물의 상징을 띠도록 하는 것이 12지에 따른 ‘띠동물’이다. 12지가 10간과 만나서 띠동물의 색깔이 한층 구체화되는데, 갑오년은 말띠해 가운데도 ‘푸른 말’을 상징하는 ‘청마의 해’이다.

 ‘띠’는 머리나 어깨, 팔, 허리에 묶는 끈으로서 색깔과 기호에 따라 사람의 정체성과 소속을 나타내는 구실을 한다. 푸른 띠를 두르면 청군이고 붉은 띠를 두르면 홍군이다. 머리띠든 어깨띠든 사상과 이념을 띠는 것이 ‘띠’이다. 따라서 운동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눈에 띄는 띠를 두르고 자기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띠동물은 무의미한 시간대에 동물의 띠를 두르도록 함으로써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고 분명한 상징성을 띠게 만든다.

청마, 그 활달한 기상의 의미

말띠해의 문화적 인식은 말의 활달한 기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옛말에 ‘장수나고 용마난다’고 하듯이, 말은 무인적 기질을 상징한다. 아기장수처럼 세상을 혁신할 인물이 나면, 영웅적 인물에 상응하는 용마가 하늘에서 강림한다. 용마는 하늘을 나는 천마이자 하늘이 낸 신성한 말이다. 용마와 짝을 이루는 인물은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는 진인(眞人)으로 인식된다.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와 천마가 그러한 보기이다. 천마와 함께 출현한 박혁거세는 6촌을 통일하여 신라를 건국하고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이념을 추구하며, 해처럼 밝게 온누리를 다스렸기에 ‘불구내(弗矩內)’ 곧 ‘밝은 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천마나 용마 같은 신이한 말은 하늘에서 주어지지만 훌륭한 인물은 스스로 준마를 길러내기도 한다. 주몽은 금와왕 밑에서 말 기르는 일을 할 때, 준마를 골라서 동부여를 무사히 탈출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고구려 건국의 업적을 이루었다. 박혁거세의 천마나 주몽의 준마는 모두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했다. 이때 건국은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건국의 진정한 의미는 기존의 국가체제를 혁신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띠해의 역사인식은 건국영웅들이 모두 말과 더불어 국가적 위업을 달성한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말은 한갓 짐승이 아니라 세상을 혁신할 영웅을 보좌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도록 하는 신이한 존재이다. 따라서 마을과 고을에서 수호신으로 신앙하는 말은 신 자체이며, 고분에 부장된 말의 조형물은 피장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령한 말이다. 말은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시간적으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말을 신성시 여기는 관념 때문에 말고기를 먹지 않는 독특한 식문화를 지녔다. 인도인들이 소를 신성시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같다. 새해는 말띠해라는 사실보다 갑오년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현실인식이다. 왜냐하면 갑오년은 ‘청마의 해’라는 12지의 상징보다 갑오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더 소중한 의미를 지닌 까닭이다. 반봉건·반외세의 깃발을 든 농민혁명은 미완에 그쳤으되, 왕정을 개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농민혁명을 두 돌째 맞는 갑오년인데도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지속되고 외세의 그늘에서 민족 주체성을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농민혁명 두 돌째 갑오년의 모습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으나 아직도 상하차별은 엄존하고 있다.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는 기준이 봉건적 문벌에서 근대적 학벌과 경제력으로 바뀌었을 뿐, 상하빈부 차별의 계급모순은 심각한 수준이다. 외세의 침탈에 의해 빚어진 분단현실은 아직 극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최근에는 민족분단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미군주둔이 반세기를 훌쩍 넘었지만, 철수 전망은커녕 작전권조차 회수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사회 곳곳에 봉건적 유제와 외세에 대한 종속이 강고하게 잔존하고 있는 현실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말 달리는 선구자”처럼, 시대를 앞서 가는 지식인은 현실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우뚝하게 나서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선다. ‘말은 서서 쉬고 서서 잔다.’ 명마일수록 죽기 전에는 결코 눕지 않는다. 청마 유치환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높이 매단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노래했다. 갑오년 청마의 해를 어떻게 몰아갈 것인가. 기수 노릇을 하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역사의 진퇴를 결정한다. 교수사회의 침묵이 아우성으로 살아나고 실천하는 지성으로 거듭 나야, 도행역시(倒行逆施)의 퇴행적 역사 흐름에 종지부를 찍고 갑오년다운 역사적 변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갑오년과 함께 청마의 말발굽소리가 대지를 진동시키며 들려온다.

임재해 안동대ㆍ민속학
안동대 인문대학장을 맡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마을민속 조사연구방법』『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등이 있다. 영남대에서 박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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