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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역사의 반복 경계
비틀거리는 역사의 반복 경계
  • 육영수 중앙대·역사학과
  • 승인 2013.12.21 2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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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역시’를 추천한 이유

 

육영수 중앙대 교수

2013년 대한민국은 (나처럼) 아둔한 역사가들이 시대정신의 흥망성쇠와 사회변혁의 (불)가능성을 체험했던 배움의 시공간이었다.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출범했던 박근혜 정부의 1년은 유감스럽게도 상식과 역사를 거슬리는 일들이 억지로 고집되고 꾸며졌던 한 해였다. 종북·빨갱이, 새마을과 정보정치, 성장우선주의 등의 단어들이 좀비처럼 부활해 이데올로기적 진영나누기와 시대착오적 감시처벌로 세포분열하고 있다. <교수신문>이 지난해에 ‘2013년 희망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던 ‘除舊布新(제구포신: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의 기대와는 달리, 낡은 것들은 더욱 강화·확대되는 반면에 새로운 혁신은 오히려 위축·거부됐던 한 해였다.

 

꿈과 소망으로 시작했던 2013년은 왜 그에 버금가는 실망과 환멸로 마무리 됐을까? 다소 거칠게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의 시대풍경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왕정복고기와 어느 정도 닮은꼴이다. 혁명이 무너뜨렸다고 확신했던 구체제(앙시앵레짐)의 특권들이 부르봉왕가의 부활과 함께 복귀했듯이, 박근혜 정부의 초반 行步는 ‘유신체제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려는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이 휘날렸던 자유·평등·우애의 깃발에 쫓겨났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컴백해서 잃었던 재산과 권력을 다시 거머쥐었다. ‘상속된 특권’의 생존과 횡포에 화난 시민들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아주 나쁜 왕’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조금 덜 나쁜 (것처럼 행세하는) 왕’ 루이-필리프를 추대했지만 이들의 형편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보듯이, 시민들과 청년 대학생들이 합세해 ‘무늬만 시민 왕’이 호령하는 반동적인 7월 왕정에 항거하는 바리케이드를 다시 쌓았다.

비교사의 장점은 유사하거나 틀린 점을 꼬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다소 거창하게 평가하자면, 혁명→군사쿠데타→나폴레옹 제국→왕정복고→또 다른 혁명 등으로 숨 가쁘게 달렸던 프랑스 근대사가 이 땅에서 비극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경계하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행역시’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했으리라. 박근혜 정부는 4·19혁명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유신체제, 군사독재, 문민·참여정부 등으로 이어지던 우리 현대사를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계승할 중요한 고비에 서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공포정치와 싸운 국민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쟁취했던 표현과 집회의 자유, 노동과 결사의 권리, 최소생존권을 보장하는 복지와 사회보장 등이 위협받거나 취소될 수는 없다. 역사도 때로는 비틀거리거나 우물쭈물하지만 잘못된 길을 거꾸로 달리다가 넘어지는 것을 우리는 걱정한다.

2013년 희망의 사자성어 ‘제구포신’과 2013년 올해의 사자성어 ‘도행역시’ 사이의 아득한 간격과 어긋남에 갇혀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빈민, 부랑아, 농촌이주 노동자, 도회지 실업자 등과 같은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이 21세기 초 이 땅에서 ‘위험한 계급’으로 재등장해서는 안 된다. 벌금을 내지 못해 ‘몸빵(징역살이)’으로 때워야 하는 수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 ‘착하니까 청춘’임을 암기하며 반값 대학등록금 미끼에 낚인 미래 청년백수들, 시간제 돌려막기 작업의 오지 않는 순서를 기다리는 비정규직 직장인들… 이들 ‘레미제라블’ 혹은 ‘위험한 계급’의 생존지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위태롭다. 장발장과 같은 소설 속의 의인이 아니라 국가가 구제해야 할 국민이며 공식 업무이다.

거꾸로 가는 시대와 함께 되돌아오는 것은 ‘유신의 상속자나 올드 보이’ 뿐만이 아니다. 역사가 계속 시대착오적인 것에 정비례해서, 7080 ‘왕년의 운동선수들’과 저항의 기억도 되살아난다.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었다’는 김수영의 시가 다시 읽히고, 역사가들은 ‘역사(교과서) 분쟁’에 불씨를 지피며, 영혼치유에 분주해야 할 종교인들도 ‘세상걱정’으로 몸살을 앓는다. ‘도행역시’로 마감됐던 2013년에 남은 한 가닥 빛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 이후 세대’인 이 땅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새로운 역사의식을 벼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네트워킹이 비누거품처럼 번져 어둡고 천박한 시대의 얼룩을 씻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전진하도록 도와 줄 것으로 기대한다.
덧붙이자면, 직업으로서의 역사가의 슬픈 운명은 과거를 항상 회고적으로 추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죽은 과거’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지점에서 역사가의 작업은 종료되며 내일을 예언하려는 욕망은 그의 존재이유를 소멸시킨다.

고백하자면, 나는 박근혜 정부가 남은 임기에 선택(안)할 정책들과 그 이후에 오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제를 실시했던 미국에서도 지난 2백수십년 동안에 단 한 번도 없었던 ‘부녀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영광과 책임감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정치가 모든 것이며 전부’인 현실은 안타깝지만, 2013년 ‘체험-역사현장’에서 단련한 역사의식과 감수성을 발휘해 그가 ‘좋은 대통령’이 되도록 후원하고 비판하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의 또 다른 권리이며 사명이다.

육영수 중앙대·역사학과
워싱턴대(시애틀)에서 유럽근현대지성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프랑스혁명의 문화사』 등이 있고, 현재 문화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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