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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세를 살았던 선비, ‘自主’를 강조하다
격동의 근세를 살았던 선비, ‘自主’를 강조하다
  •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13.11.19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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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 교수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숲’ 12. 『국역 면암집』


▲ 『국역 면암집』勉庵集 최익현 지음, 김도련 외 10명 옮김 색인포함 3책 민족문화추진회, 1997~1998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시작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권을 빼앗김으로 해서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은 현존의 국가가 아니라 역사 속의 과거가 됐고, 다음 시대로 역사의 계승을 이루지 못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자주권의 상실은 그보다 5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고종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주도하에 우리의 외교권을 일제에 넘겨버린 치욕과 아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논설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조약의 부당성과 일제 침략을 비판했으며,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국권침탈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勉菴 崔益鉉(1833~1906)은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해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내고 물에서 건져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히 있을 수가 없다”(연보 74세)라고 말하며, 의병 봉기의 길을 선택했다.

면암이 태어난 1833년은 순조 33년으로 전통시대의 모습이 그런대로 계승되던 때였다. 따라서 그도 과거의 문인, 학자들이 걸었던 길을 걷었다. 어려서는 華西 李恒老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고, 23세에는 문과에 급제해 순탄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품은 기울어가는 시세에 결코 순응할 수가 없었다. 고종 초기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행사할 때에 시정의 폐단을 극력 논해 시대의 권력인 대원군과 맞서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지목해 비판
1873년에 올린 상소에서 “그 어떤 자리에도 있지 않고 오직 親親의 반열에 속한 사람은 다만 그 지위를 높이고 그의 녹을 중하게 하고 그와 좋아하고 미워함을 같이만 하시고, 나라 정사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하소서.”(「호조참판을 사직하고 겸해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소」)라고 해 대원군을 지목하며 비판했다. 권력에 대항하다가 화를 당할까를 걱정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皐陶가 법관이 되면 천자의 아버지도 법으로 집행하는 데, 만일 形迹에 구애돼 국가의 위급함을 두고만 보고 말하지 않으면, 그런 신하를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연보 41세).

 舜임금의 신하로 철저하게 법을 집행했던 皐陶의 예를 들어,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도 잘못이 있는 경우 법으로 다스려져야 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정사는 두 문에서 나오게 할 수 없으니, 나라에 두 임금이 있고 정사가 두 문에서 나오게 되면 크게 어지러워지는 법이다”라고도 지적해, 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비판했다(연보 43세). 권력에 영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품을 잘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1876년 일제 침략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병자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짊어지고 대궐 앞에 나아가 화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서 노숙하며 처결을 기다렸다. 도끼를 짊어지고 나아가 상소한다는 것은, 청하는 의견이 옳다면 받아들여 채택하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가지고 간 도끼로 자신의 목을 베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 상소에서 그는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리고 1904년의 상소에서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것에 반대하며 自主를 강조했다.


“이 재앙의 유래를 찾아보면 모두가 ‘依附’라는 두 글자가 병이 된 것입니다. …… 신은 원컨대 폐하의 마음으로부터 먼저 타국에 依附하려는 뿌리를 끊어버리시고, 폐하의 뜻이 흔들리거나 굽히지 아니하도록 확립해서, 차라리 自主를 하다가 망하더라도 남을 의지해 살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며 두 번째 올리는 소」)

을사오적 처단 상소 올리기도
그러나 면암의 바람과는 달리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실질적인 주권이 모두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그는 다시 격정의 상소를 올린다.
“삼가 아룁니다. 아, 슬픕니다! 나라를 망치는 도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까마는, 어찌 금번 외국과의 조약에 함부로 도장을 찍은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 빨리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바로잡고, 외무부의 관리를 가려 뽑아 일본 공사관에 빨리 문서를 보내 맹약을 강요한 거짓 문서를 없애도록 하고, 또한 급히 각국의 공사관에 통보해서 모두 모여 담판해 일본이 강세를 믿고 약국을 위협한 죄를 성토해야만 할 것입니다. …… 지금 만약 한결같이 두려워 움츠릴 뿐이라면 두려워하는 것은 망할까 두려워함입니다. 이제 이미 망했으니 다시 무슨 두려워하고 꺼릴 바가 있습니까.……”(「오적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소」)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상황에서 몇 마디의 상소로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면암은 결국 倡義를 결심하게 된다.

집안의 사당에 하직하고, 가족들과 이별한 뒤에, 호남의 인사들과 모여 의병을 조직해 一戰을 준비했다. 그도 어찌 이 싸움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국가에서 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라는 뜻으로 74세의 老軀를 이끌고서 분연히 일어났던 것이다.


전라도 순창에서 진을 치고 결전의 태세를 갖추었을 때, 진압대로 왜병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고 해 싸움을 포기하고 그대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이후 대마도로 다시 압송돼 구금됐는데, 갓과 망건을 벗기려는 왜병을 꾸짖고 칼의 위협에도 오히려 가슴을 헤치며 찌르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기개가 여전히 쇠하지 않아 총칼의 겁박에도 오히려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명을 따를지언정 차라리 단식으로 명을 마치겠다 마음먹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우리 정부에서 오는 것이라는 설득으로 간신히 그의 뜻을 거두게 할 수 있었다. 70세를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추상같은 기상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내다가 결국은 대마도에 구금된 지 4개월 만에 그곳에서 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올린 마지막 유언의 상소에는 “참아서는 안 될 것을 참지 말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믿지 말며, 虛威를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듣지 마시고, 더욱 自主하는 정신을 굳게 하시어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끊으소서” 라고 직언해 끝까지 自主의 길을 강조했다(遺疏).


그의 문집은 간행 직후 일제의 검열에 걸려 상소 등 항일의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이 압수되고 원판이 깨뜨려졌는데, 다행히 검열 전에 배포된 몇 질이 남아 그가 남긴 글을 온전히 전할 수 있었다. 문집은 재간행을 거쳐 50卷에 가까운 거질로 전하는데, 번역서는 1978년에 그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핵심적인 글만을 일부 뽑아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게 3책으로 간행됐으며, 권차의 구분 없이 문체별로 詩, 疏, 書, 雜著, 記 등으로 편집했다.

완역이 아닌 選譯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남긴 글 중의 정수만을 따로 추렸기에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더욱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상소를 통해서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생각과 주장이 잘 드러나 있어 그가 남긴 글 중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으며, 마지막에 부기된 연보는 역사의 중심에 섰던 한 인물을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서술돼 있어 개인의 일대기에 그치지 않고 굴곡진 우리나라 근대를 기록한 역사서라 하겠다.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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