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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죽어가는 사회
언어가 죽어가는 사회
  • 권경우 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승인 2013.11.0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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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권경우 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지난해 9월 24일자 <한겨레> 신문에 ‘절필’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그렇다면 글쓰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작가로서의 무력감을 피력한 것이 바로 그의 고백이다. 사실 오늘날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교수를 포함하는 연구자 및 지식인들은 자신이 하는 연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직업으로서 학문’에 충실할 뿐이다. 자신의 연구와 학문의 효과나 의미를 고민하기보다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거나 노후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래서 고종석처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업을 중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고종석이 글의 힘을 부정했으면서도 실제로 생산되는 문자텍스트로서의 글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과 댓글, 블로그, 트위터와 페이스북, 여러 형태의 문자메시지 등은 문자텍스트의 새로운 공간으로 작동한다. 책을 쓰는 사람들도 평범한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늘고 있다. 스마트폰은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페이스북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라고 묻는다. 사람들은 여기에 자신의 상태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다. 또한 정치인, 스포츠스타, 연예인 등 소위 ‘유명인(celebrities)’의 말은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약속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이 사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말은 힘도 없고 가치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한국사회는 ‘언어의 위기’ 혹은 ‘언어의 죽음’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는 말과 글의 힘과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베’의 등장과 유행은 언어가 죽었다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일베 사이트에서 민주화나 산업화 등의 용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언어를 통한 인간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이 ‘평검사와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은 어쩌면 언어의 기능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진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공약 불이행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말을 할 때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임기 초반에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와 관련해서 대국민사과를 할 때, “청와대 뒷산에 올라 시위대의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과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감사원의 발표처럼, ‘4대강 사업’이라는 명칭은 사실상 ‘대운하 사업’이었고, 강을 ‘살린다’고 했지만 강은 ‘죽었다’. 감사원에서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200년을 내다보고 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언어의 기표와 기의 관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기의 없는 기표’만 떠다닐 뿐이다.
언어를 둘러싼 비슷한 양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인터넷에서 뉴스 제목을 보면 ‘경악’, ‘공포’, ‘충격’ 등의 용어는 더 이상 충격이나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언어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제 말과 글이 빠진 자리에 순간적인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이 차지한다. 아픔과 고통, 슬픔까지도 마치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처럼 소비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한다. 혁명의 불가능성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 사용에서 가능한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절망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세상,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그 말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대책위를 이끌고 있는 이계삼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이 그들이다. 이계삼은 전직 국어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믿는 말의 힘과 가치를 가르쳤지만, 지금 말이 힘을 잃어버린 현실에 절규한다.

더 이상 말로써 고통과 슬픔을 전달할 수 없는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이창근 역시 수많은 보도자료와 성명서과 탄원서와 칼럼을 썼지만, 실제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전달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말을 못 하게 만든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의 사용이다. 그리고 언어는 민주주의의 토대이다. 토론과 합의는 말의 영역이고, 법치는 글의 영역이다.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동물의 왕국’이 도래하고 있다.

권경우 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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