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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증명해내는 '살아있음'의 의미
온 몸으로 증명해내는 '살아있음'의 의미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0.28 12:2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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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이즈 로스트」_ 전설이 된 배우의 생존기

 

노년에 마련한 자신 만의 공간, 견고한 성 같던 요트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망망대해에서 믿을 것이라곤 나침반과 육분의, 항해경험 밖에 없는 레드포드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아니 극복할 수는 있을까. (사진제공=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만신창이가 된 영혼과 몸뚱이 말고는 남은 게 없다. 반나절 분량의 식량만 남았다. 미안하다. 모두에게 진실하고, 다정하며,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암흑 속에서 유일한 대사라고 할 만한 이 독백으로 喜壽를 넘긴 로버트 레드포드의 「올 이즈 로스트」(J.C. 챈더 감독)는 시작한다. 8일 전, 수마트라 해협으로부터 1700해리. 순조롭게 인도양을 항해하던 그의 작은 요트는 어디선가 떠내려 온 컨테이너 박스와 충돌한다. 한 개인의 평온하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전조가 된 컨테이너 박스가 대륙간 무역으로 파생되는 국가 간 경제 불균형, 노동착취, 환경문제 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20세기 미국문학의 힘 농축된 레드포드 식「노인과 바다」

레드포드는 노련하다. 해풍을 이용해 배를 기울여 더 이상 물이 요트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젖은 통신장비와 지도를 말리고, 배를 수리한 후 느긋하게 통조림을 따 식사를 해결한다. 컨테이너 박스라는 人災에도 의연하던 그지만, 곧이어 몰아치는 폭풍이라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그의 노련함도, 완력도 무력하다. 노년에 마련한 자신 만의 공간, 견고한 성 같던 요트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망망대해에 믿을 것이라곤 나침반과 육분의, 항해경험 밖에 없는 레드포드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아니 과연 극복할 수는 있을까.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이후 「올 이즈 로스트」는 조난 영화들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치들로 계속된다. 「올 이즈 로스트」에는 화려한 CG도 없다. 「 라이프 오브 파이」(2013, 이안 감독) 촬영감독인 피터 주카리니가 담아낸 물고기 떼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유영 장면이 잠시 눈길을 잡아 끌 뿐,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오롯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힘에 의존한다.

기존의 재난영화들과 비교해 레드포드의「올 이즈 로스트」가 갖는 차별점은 뭘까. ‘망망대해에서의조난’이라는 테마 자체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는 낯설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익숙히 반복·변주된 테마다. 문학은 이미 해양을 통한 18세기 제국주의의 발전 경로를 고도의 은유로 묘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이즈 로스트」가 이 테마에 전면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E.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1952)를 통해 켜켜이 쌓아올린 20세기 미국 문학의 농축된 힘이 레드포드의 주름진 얼굴에 비친다.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노인이 사투를 벌여 녹색치를 잡았지만 상어들에게 다 빼앗긴 단순한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레드포드 역시 106분의 러닝타임 동안 증명해낼 수 없는 사투를 벌인다. 결과가 중요한가, 과정이 중요한가. 노배우의 늙은 육체가 이 사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정신과 영혼의 향기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이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늙어가는 과정에서 ‘속물’이 되기 쉽지만, 그 속물성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청년의 영혼의 위대함을 레드포드는 온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106분 동안 증명해낼 수 없는 사투를 벌인다. 결과인가, 과정인가. 노배우의 늙은 육체가 이 사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정신과 영혼의 향기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이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제공=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1936년생의 로버트 레드포드는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시대마다 관객들이 좋아하는 배우는 많이 있었지만, 가장 미국인다운 상을 제시한 배우가 존 웨인 이후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듯한 외모, 순수해보이면서도 지적인 풍모를 내뿜는 이 금발 배우는 그의 외모 덕분일까, 데뷔부터 순항했다. 폴 뉴먼과 함께 자유분방한 은행 강도로 분했던「내일을 향해 쏴라」(1969, 조지 로이힐 감독), 속고 속이는 반전의 묘미를 보여준 도박 영화 「스팅」(1973, 조지 로이힐 감독), 영화음악으로 국내 팬들에게 더 익숙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의 사랑 이야기「추억」(1973, 시드니 폴락 감독),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시드니 폴락 감독)은 금새 이 젊은 배우를 미국의 영웅이자 연인으로 자리매김 시켰다.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로버트 레드포드는 이내 감독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의 감독 데뷔작 「보통 사람들」(1980)은 74회 아카데미감독상을 수상했고 이후 감독으로서의 길 역시 탄탄대로였다. 브래드 피트를 국내에 알린 「흐르는 강물처럼」(1992)과 인간미 넘치는 영화 「호스 위스퍼러」(1998) 역시 그가 연출한 작품들이다. 「퀴즈쇼」(1995)와 「호스 위스퍼러」(1998)는 모두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꼭 닮아있다. 성냥개비를 입에 문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무법자들로부터 목장을 지켜내는 서부극의 아이콘. 30년의 세월이 지나 스스로가 하나의 장르가 돼 버린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그랜 토리노」(2008) 등 으로 감독으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레드포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1985년, 독립영화축제의 메이저이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영화제 중 하나가 된 ‘선댄스영화제’를 만든 것이다. 영화제의 이름인 ‘선댄스’에는 사연이 있다. 배우로서의 그를 알렸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서 그가 분했던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상업영화에서 이미 최고의 자리에 있던 레드포드는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의 독립영화들이 자본이 잠식해버린 영화 배급의 구조 속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젊은 감독들이 그들의 영화를 마음껏 상영할 수 있도록 ‘영화제’라는 플랫폼을 마련했다. 그 덕분일까. 지금 선댄스영화제는 최고의 독립영화 축제로 불리고 있다. 한국 영화와도 인연이 있는 선댄스영화제. 제주 4·3 사태를 다뤘던 오멸 감독의 「지슬2-끝나지 않은 세월」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초래한 비극을 정면으로 다뤘던 이 영화가 미국 본토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것은, 그만큼 선댄스영화제가 정치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며, 영상미학에 큰 심사배점을 두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천재 감독의 연출력 넘어서는 관록의 연기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인생의 平地風波를 겪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해 보이는 이 남자의 고군분투는 영화 내내 한 마디 대사없이도 관객을 휘어잡는다. 「 올이즈로스트」는 그런 그가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아 그것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때론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을 숨죽이게 만들고, 마치 함께 물에 빠진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게 만드는 것도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챈더 감독의 연출력을 넘어선 레드포드의 관록의 연기 덕분이다.

배우로 시작했던 그의 인생은 감독이라는 자아실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영화 후속세대에게 선댄스영화제라는 또 다른 꿈을 심어줬다. 한 개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세계에 얼마나 큰 파급 효과를 끼쳤는지, 레드포드는 「올 이즈 로스트」내내 보이는 사투 속에서 그 ‘살아있음’의 의미를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듯하다. 이 영화의 백미인 엔딩씬에 다다르면, 자신도 모르게 외칠지도 모른다. 로버트 레드포드. 이미 전설이 된 당신, 죽지 말라. 그리고 부디 영화의 미래를 보여 달라고.

윤상민 학술문화부 기자

프랑스 프로방스대에서 영화학으로 석사를 했다. 학부 영화동아리에서 16mm 단편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타지, SF 장르 등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파고드는 영화에 관심이 있고, 언젠가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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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민 기자 2013-12-10 10:10:42
콜러스3세님, 반갑습니다. '글이 맛있다'는 과찬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감사해요~ ^^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콜러스3세 2013-10-29 22:15:18
로버트 레드포드의 올 이즈 로스트 꼭 보게될 것 같군요, 그의 영화에도 무척 흥미가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윤상민 기자님의 글을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뭔가 외침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글이 너무 맛있습니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제 한계점을 인식하면서. 다음에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