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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의 정치 극복하려면 진영 내 대화부터 시작하자"
"비토의 정치 극복하려면 진영 내 대화부터 시작하자"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0.21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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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보수 주제로 한 일송학술대회 종합토론 현장 스케치

보수와 진보에 대한 논의는 많았다. 그런 만큼 날이 선 토론이 아니라면 새로운 논의가 이뤄지거나 새로운 견해가 도출되기 힘들다. 하지만 지난 11일 ‘보수·진보의 개념과 역사적 전개’를 주제로 열린 일송학술대회는 그 점에서 기존 논의들과 조금 달랐다. 현재 대한민국을 진영 논리로 갈라놓고 있는 보수·진보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플로어의 춘천시민과 인근대학 교수들의 질문으로 표현돼 발표자와 토론자를 에워쌌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보수·진보에 대한 기존 논의를 답습하는 차원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부분이었다.

첫 번째 토론자로 참여한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의 현 실상에대해 “많은 이들을 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것을 얻으려 애쓰는 둘 모두가‘수구스럽고 퇴행스럽다”고 꼬집었다. 또한 그는, 상대방을 짓이기면서도 돈을 받고 자기의 기반을 지켜가는 행태를 보면 ‘격투기 선수’가 연상된다고 덧붙였다. 소모적인 보수·진보 갈등의 원인으로 ‘이해 관계’를 지목한 이 교수는 “정권을 위한 이해구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언론, 학계, 시민사회 영역까지 갈라서기가 넘쳐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갈등 극복 방안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한 그는 정당의 지나친 권력 집중 불균형을 보정시키는 제도적 보완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2012년 대선이 보수와 진보 세혁의 민주주의와 성장에 대한 큰 틀을 합의한 의미 있는 선거였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과)는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공약이 진보 세력의 공약을 대거 수용하며 이념 대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보수의 포용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인수위부터 보인 ‘변형주의’적 태도로 인해 공약의 실현가능성이 의심된다. 대결적이고 상대를 제압하려는 태도도 우리나라의 장래와 그를 지지했던 보수 세력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현 정권의 상황에 대한 우려감을 내비쳤다.

한국의 이념지도는 성장과 분배, 냉전과 반공이라는 두 축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과)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 타협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장 교수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제주도력이 늘 정권초기에 충돌한다. 비토의 정치가 되는 거다. 불과 몇 년 전 야당 혹은 여당의 해동을 배우지 않고 그대로 반복하는 수준을 되풀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회학자들의 토론이 끝나자마자 플로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들이 쏟아졌다. 뇌과학을 연구하는 신형철 한림대 의과대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를 뇌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써 학술대회 참가자들의 공감을 샀다.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겪어가고 있는 지금은, 사회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세포가 거의 없는, 한 개인으로 보면 청소년기에 남아있는 상태다.” 또한 그는 “현재 사람으로 보면 병이 든 상황인데, 자기 몸을 제 몸으로 인식 못하는 좌파, 종북, 진보, 보수 신경세포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상황이다”라며 장기적 측면에서 민주시민교육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 청중의 여러 발언 중에도 춘천시민 한상중 씨의 고민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개념에 주목했다. “나는 이른바 친미, 반북주의자다. 그러면 보수다. 하지만 동성애자의 권리는 보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진보인데, 그럼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보수·진보에 대한 학계의 명쾌한 개념 정리를 요구했다.

스스로를 서울에서 온 아마추어 연구자로 소개한 한 시민도 가세했다. 그는 “노무현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두고 몇 시간을 얘기하는 토론프로그램을 보고도 결론을 모르겠더라. 또 유시민과 노회찬은 서로에게 진보로 건너오라고 하더라”고 말하며 각각 정의하는 ‘진보’의 개념이 다른 이유를 물었다.

절제된 토론자들 뜨거웠던 청중

답변에 나선 김인영 한림대 교수(정치행정학과)는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려운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구분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다. 정치적 목적 획득을 위한 진영논리의 보수·진보 구분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진보적 태도, 보수적 태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허수 한림대 HK교수(한국근대사)는 ‘개념’에 대한 학계의 신중한 접근을 요구했다. 그는 “개념은 경계가 분명한 것이 아닌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충돌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나눠 서로를 규정하고 권력 장악을 위해 투쟁하는데, 학술담론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이분법적 논리와는 거리가 유지돼야 한다”라며 보수·진보 학술 담론의 새로운 관점을 요구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극복과 상생을 말하기 전에 각 진영 내에서부터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15년간 노사정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과)는 “경제문제에서 재벌중심의 독과점 체제가 있듯이, 노동문제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경실련, 참여연대에 집중돼 있다. 몇몇 시민단체가 과잉 대변되고 있는 구조로는 진영 내의 소통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현 보수 정권의 변형주의에 대해서 원색적인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태도는, 훗날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같은 실패를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현명한 보수, 합리적 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한림과학원 HK 사업단의 어젠다인 ‘개념사’와도 맞닿아 있다.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두 시선, 보수와 진보에 대한 학계의 고민과 춘천 시민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시될 때, 건강한 보수·진보에 대한 유의미하며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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