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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혼이 파고든 이것, 종교와도一脈相通하더라
예술가의 혼이 파고든 이것, 종교와도一脈相通하더라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3.10.16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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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92_ 물고기 닮은 목탁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어라. 언제나 昏굸과 散갺에서 깨어나 一心으로 살아라. 그와 같은 삶이라면 너도 살고 남도 살리고, 너도 깨닫고 남도 능히 깨달을 수 있게 하리니……”

물고기는 잘 때도 두 눈을 뜨고 잔다. 잠자지 말고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뜻이 의당 목어, 목탁, 풍경에 스며있다. 木魚와 風磬은 엇눈으로 봐도 물고기와 흡사하지만 木鐸은 눈여겨봐야 그 닮음을 알 수가 있다. 목탁에 뚱그런 구멍 둘이 나있으니 그것이 물고기 눈이요, 손잡이가 바로 꼬리지느러미에 해당한다.

땅 땅 땅!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 쉼 없이 猛進하여 道를 닦을 지어다! 바람에 ‘땡그랑땡그랑’ 풍경이 때려내는 은은함은 산사의 정적을 깨트릴 뿐만 아니라 깜빡 졸고 있는 道僧의 낮잠을 쫓는다. 落命의 그날이 코앞에 다가오는 지금, 나는 뭘 했는가? 소태 같은 쓴 세월을 다 보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마음엔 굳은 살 박히지 못 했을 뿐더러 平心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목어는 1m 길이의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 속을 파내어서, 아침저녁 예불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리는 도구다. 이는 중국의 절에서, 아침을 먹을 때와 낮에 밥 먹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던 것으로, 원래의 모양은 길고 곧게 물고기처럼 만들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수행에 임하는 수도자들도 잠을 줄이고 물고기 닮아 부지런히 깨우침(覺)을 위해 정진하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 목어가 차츰 모양이 변하여 지금 불교의식에서 널리 쓰이는 佛具중의 하나인 목탁이 되었다고 한다. 또 목어는 처음엔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머리에 물고기 몸을 가진 頭魚身의 형태로 변신했고, 드디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되었으니 이는 잉어가 용으로 변한다는 魚變成龍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後漢書』에 있는「」의 고사가 윤색돼 이뤄진 것으로 본다. 곧, 복숭아꽃이 필 무렵 黃河의 잉어들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오르다가 의 거칠고 가파른 협곡을 뛰어올라야 하는데, 거의가 실패를 하지만 요행히 성공한 잉어는 용으로 화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이 곧 해탈을 의미한다고 한다.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나 속세 간의 근심 없는 편안한 마음의 경지요 그곳이 곧 涅槃이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동차 꽁무니에 붙어있는 물고기형상을 자주 봐왔을 것이다. 나는‘기독교신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물고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초대교회시대에 로마는 무척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때 사람들은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 등지에서 숨어 지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밝히기 위해 물고기 그림을 보이거나 물고기모형의 조각품을 지니고 다니기도 했으며, 몰래 땅바닥에 물고기 그림을 그려 자기 신분을 알렸다 한다. 필자도 거기를 가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순교적인 산물이 카타콤이었고, 지하카타콤의 迷걟에 길을 안내하는 그림도 물고기로 표시했다고 하니 물고기는 일종의 암호였던 것이다.

다음은 장군의 갑옷이야기로, 장수의 甲衣에는 의례 물고기 비늘이 온통 주렁주렁 달려있다. 햇볕에 반사된 번쩍거림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한다. 물속의 피라미 갈겨니도 가끔씩 몸을 기우려 햇살에 몸(각도)을 맞춰 번쩍번쩍 은백색을 쏘아대며 상대를 겁준다. 참고로 물고기 중에 이들처럼 체색이 희거나 밝은 것은 하나같이 주행성이고, 메기, 뱀장어 같이 흐린 것은 야행성이다. 어쨌거나 갑옷 입은 장수는 물고기요, 물고기 중에서도 대장 물고기를 이른다. 역시 밤낮 눈을 감지 말고, 적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말며, 많은 졸개를 잘 인도하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리라. 어디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만 물고기가 돼야하겠는가. 祿俸을 먹고사는 우리들 선생들도 모두모두 물고기가 될지어다. 난 월급 타령하는 교수가 제일 밉더라. 無上의 기쁨은 고통의 深海에 감춰있다고 하지 않는가.

피카소 작품 하나가 우리의 눈을 끈다. “예술은 절대로 정숙하지 않아서, 결국 남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갈파한 전설적인 화가가 밥상에서도 익살을 떤다. 그 양반이 입에 물고 있는 물고기 뼈 사진 말이다. 절로 웃음이 난다. 웃음은 가난도 녹인다고 했던가. 아무튼 예술가의 혼은 먹다 버리는 생선뼈다귀도 파고든다!

생선 한 마리의 살을 일일이 마음 써서 볼가 먹고 나서 그것을 진흙 덩어리에다 꼭 눌러 박아 흔적을 남겼으니 그것이 물고기화석처럼 보인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다. 알을 품고 있는 암꿩은 여간해서 도망을 가지 않으니 꿩도 알도 다 먹는다는 이야긴데, 생선뼈를 목에 걸리는 가시 정도로 생각하지 않고 혼을 불어넣을 소재로 보는 유별난 눈을 닮아 볼 것이다.

그렇다, 물고기는 잠을 자도 눈을 감지 않는다. 땅 땅 땅! 고즈넉한 산사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목탁소리! 그것은 물고기를 본뜬 목어가 아니던가. 몸통이 큰 복어를 닮았다고 할까. 기독교의 상징이 물고기인 점과 어쩌면 닮았단 말인가. 결국 종교는 공통으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니, 불교와 기독교는 不二의 관계인 것. 엉뚱한 소리지만 물고기는 물에 살아 자나 깨나 몸을 씻어대니 얼마나 心身이 정결할까. 洗禮가 필요 없는 동물이 물고기렷다. 물고기가 여러 종교, 무술, 예술들을 아우르고 있더라!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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