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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기억,역사의 아이러니를 말하다
광장의 기억,역사의 아이러니를 말하다
  •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3.10.15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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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1_ 여의도광장

▲ 지금 그곳은 이렇게 초등학생들이 자전거를 타는 공원광장으로 변모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1974년 항공사진에 찍힌 당시의 여의도광장
여의도는 대한민국의 말(言)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다. 民의 소리를 듣고 대변한다는 국회의사당이 있고, 여론을 모으고 유포하고, 초등학생들의 유행어까지 만들어내는 방송국이 다 모여 있다. 맨해튼의 월가를 떠올리게 하는 금융가의 스카인 라인, 여기가 ‘증권가 찌라시’의 출발지다. 그래서 이곳은 백성의 소리, 공영방송의 소리, 새가 듣고 쥐가 듣는다는 소문까지, 온갖 소리들이 모이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여론공작소이다.


대한민국의 말이 만들어지고 흩어지는 이곳에 12만평의 거대한 광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당초 의도와 상관없는 일이라 해도, 그럭저럭 뭔가 말이 만들어질 것처럼 보인다. 이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날(生) 목소리를 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민중이든. 어쨌든 최고 권력자의 욕망이 가시화된 5·16광장은 대한민국 제 1호 계획도시 여의도 안에 제일 먼저 자리 잡았다.

목장에서 비행장으로, 다시 광장으로
한강의 河中島인 ‘汝矣島’는 문헌에 의하면, 仍火島, 羅衣島라 표기돼 있으며 ‘너의 섬’, ‘나의 섬’이라 불렸다. 이 섬은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 쓰이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들어서기도 했던 곳이다. 김포비행장이 건설된 1936년 이전까지 군과 민이 공동으로 이용했던 우리나라 유일한 비행장이었다.


무엇보다 사대문 밖, 서울의 외곽에 있던 이 ‘너른 모래섬’이 대한민국 서울의 지도를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은 1960년대 막바지였다. 당시 김현옥 시장의 한강정복 프로젝트는 1967년 12월 여의도 윤중제 기공식을 시작으로 첫 삽을 들었다. 윤중제와 밤섬 폭파로 상징되는 여의도 개발, ‘110일간의 혈투’는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한 5·16군사정권의 ‘작전’처럼 진행됐다.


수중도시 여의도를 계획할 때, 당초 이곳에 무엇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복안이 없었다. 제일 먼저 입주신청을 한 국회의사당을 제외하면 그렇다할 구체적인 조감도는 없었다. 80만평의 ‘새로운 국토’가 만들어졌을 때, 남은 과제는 이 땅을 팔아 텅 빈 서울시의 금고를 채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오늘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의도 빌딩들의 조합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아무 것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대규모 아스팔트 광장이 들어선다. 당시 광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크렘린광장이나 톈안문광장에 버금가는 광장을 만들라’는 대통령의 지시로 12만평의 대규모 ‘빈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의도를 완전히 양분하는 광장의 등장으로 여의도는 남북이 갈라졌다. 당초 여의도 개발계획에서 6만평 정도의 녹지나 문화예술 시설을 갖춘 시민공원이 구상돼 있었지만, 이러한 구상은 한방에 무화됐다. 뿐만 아니라 이 광장의 확장은 ‘꿈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수근 팀의 당초 도시계획이 틀어진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1년 9월 29일. 길이 1천3백5십 미터 폭 3백5십 미터 넓이 11만4천 평, 2백만 명까지도 들어설 수 있는 당시 세계 최대의 광장이 탄생했다. 여기에다 유사시에는 전투기의 이착륙을 위한 임시비행장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가 덧붙여졌다. 이 광장은 5·16광장이라 명명됐다. 그해 10월 1일 ‘45만명’(<경향신문>, 1971.10.1)이 참석한 국군의 날 기념식이 5·16광장의 첫 공식행사로 거행됐다.


5·16광장은 이미 그 명명에서 권력자의 욕망이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광장을 구획하고 배치한 권력은 ‘비움’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억을 드러낸다. 이때 텅 빈 광장은 열린 소통의 장이 되기보다 오히려 ‘아고라포비아(agorafobia)’를 유발한다. 5·16광장은 그렇게 비움으로 권력자의 욕망과 기억을 드러내었다.


광장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 6월 30일, KBS방송국에서 한국전쟁 33주년 95분짜리 1회용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 유명한 ‘이산가족: 지금도 이런 아픔이…’. 당초 1회로 기획됐던 이 프로그램은 장장 136일 453시간 45분의 생방송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낸다. 이 기간은 분단 후 38년, 전쟁 33년, 정전 30년의 피맺힌 한이 와락 터져 나오는 처절한 순간들로 이어졌다. 이때 방송국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방송국 마당을 넘고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웠다.

봉인과 통곡, 이산가족 상봉을 넘어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냉전의 산물로 탄생된 장소에서 다시 냉전의 상징인 이산가족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치며 한을 쏟아내고 있다. 여의도광장은 남남 이산가족들의 사연들로 넘쳐났고, 이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쳐 냉전의 아스팔트가 봉인해 놓은 벽을 여기저기서 뚫었다. 5·16광장이 만남의 광장으로 치환되면서 이 장소는 한국전쟁의 후일담이 됐다. 반공/근대화의 불도저 앞에서 한쪽으로 밀쳐두었던, 들리지 않았던 ‘잃어버린 30년’이 쏟아져 나왔고, “맞다 맞아”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대중가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광장 마당을 게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 1985년 남북 간 ‘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 채택을 계기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처음 성사됐다. 우리의 이산가족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상흔, 그리고 적대적 냉전체제를 상징한다. 지난 추석 며칠 전에 일어났던 해프닝, 3년 만에 재개된 이산가족상봉 연기 소식에 몇 십 년만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당사자들은 추석명절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잃어버린 30년에서 30년이 더 지난 지금, 여전히 이산가족상봉은 번번이 정치적 협상의 카드로 등장할 뿐이다. 이산의 아픔과 그리움을 안고 숨죽이며 살아가던 이산가족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던 여의도 만남의 광장의 통곡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여의도 광장의 역사는 우리 현대사의 그것이 됐다. 이 광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90년대 말. 서울시는 ‘푸른 도시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광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나무를 심었다. 생태연못을 옮겨놓고, 한국 전통의 숲도 만들고, 잔디마당도 만들고, 문화의 마당을 만들고, 자전거도로 산책로도 만들었다. 세종대왕 동상도 배치했다. 텅 빈 공간이었던 곳이 이번에는 생태도 있고, 전통도 있고 이것저것 몸에 좋고 보기에 좋은 것은 다 옮겨다 놓았다. 도심에 공원이 탄생했고 회색 아스팔트 여의도에 녹색을 입혔다. 색은 달라졌지만, 누구 말대로 자고 일어니 보니 광장이 생겼고, 공원이 생겼다.

광장이나 공원은 위로부터 전달되는 하나의 목소리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지 않는다. 여기에 모여든 필부필부들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얽히고설키면서 그 생명력은 증폭된다. 5·16 광장(여의도광장)과 여의도공원 사이에 ‘만남의 광장’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남북의 정치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질 때마다 마른 눈물에 숨넘어가는 절절한 허파를 부여잡고 있는 이산가족들은 한반도의 悲願이다. 광장의 정치는 필부필부들의 크고 작은 소리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아고라, 열린 소통의 공간으로 광장을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야말로 ‘도심의 허파’를 만드는 일이다.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필자는 한국현대소설·로컬리티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문학담론에서 로컬리티 구성과 전략」, 「지역문학관의 재현과 로컬리티」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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