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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_ 어느 일간지 주필의 ‘칼럼’을 읽고
세평_ 어느 일간지 주필의 ‘칼럼’을 읽고
  • 신명아 경희대·영문학
  • 승인 2013.09.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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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아 경희대·영문학

오늘 아침 한 일간지의 주필 칼럼, 「묵은 시대와 작별하는 법」을 읽고 그 글의 헛된 관대함에 놀라 펜을 들었다. 이미 과거에 청산됐어야 할 불의를 정산하려는 이 시점에서 그런 글은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 우리가 하는 정산의 방법도 그나마 일신의 감금이나 신체적 상해의 차원이 아니라 금전적 정산이라는 고양된 형태로 하는 마당에, 전두환이라는 묵은 시대를 흘러가게 하자는 견해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

칼럼의 주제는 왜 우리는 “전두환 씨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 흘러갈 때를 놓친 전두환 씨를 과거로 흘러가게 하고 그에게 붙들렸던 우리도 함께 풀려나 미래로 전진해야하지 않을까”다. 애시당초 그 칼럼에서도 밝혔듯이, 이제는 우리가 소위 거사라고 표현한 전두환의 쿠데타가 적법한 절차가 아니라 ‘내란’임이 지적됐다. 그 내란 이후 거머쥔 권력으로 수많은 시민을 계엄군의 군화 아래 피 흘리고 죽게 한 전두환이라는 주체에 대한 정의 차원에서의 정산은 이미 더 철저하게 이뤄졌어야 했다.

이런 정산의 과정이 착한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들의 정서로 인해 미온적으로 미뤄져 오다가 지금 가장 온건한 형태로 정산의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정산의 의지는 그 아들을 소환하면서 혹시라도 조사 과정에서 참고인의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법권의 메시지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시점에서 이 주필의 칼럼은 한 언론인의 ‘오피니언 리딩’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눈가리개, 혹은 조사 후 밝혀질 엄청난 기하학적 액수의 돈을 숨긴 악행을 희석하는 물 타기의 효과를 초래할까 우려된다. 이런 한 언론인의 ‘오피니언 리딩’은 이제야 플라톤이 개인적 편견을 오피니언, 독사(doxa)로 정의내리고 진리와 차별시킨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이런 오피니언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재고돼야 한다.

그 주필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고 김대중 대통령이 썼고, 원래 나치의 ‘호모 사케르’ 즉 ‘헐벗은 생명’의 주역이었던 유태인이 했다는말,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를 들먹였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 말의 해석은 같은 말이 이렇게 그 진의가 역으로 사용될 수 있었음을 예증해 준다. “‘용서하지만, 잊지는 말자’라는 자비로운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나(망각된 죄인)는 영원히 자기가 저지른 죄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죄가……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비로운 과거 청산이 오히려 그 죄인으로부터 죄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전두환에게도 적용돼 죄인으로부터 죄를 뉘우칠 기회를 박탈해 거짓말로 자신의 재산을 속이게 했고, 급기야는 앞으로 밝혀질 어떤 잘못으로 인도됐는지 두고 볼 일이다. 지젝은 역사에서 불의가 불완전하게 청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잊는 것은 응징(혹은 정당한 징벌을)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이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는 것이다.”

칠레의 국민들은 바로 이런 진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그들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죄의 청산을 위해 그가 국외로 도망간 뒤에도 수년 동안에도 추적을 계속했고, 급기야는 영국으로 도망간 그를 불러들여 정산 작업을 완수했다. 그 칼럼이 원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전두환을 흘러가게 하자고 했듯이, 이제 미래로 나아갈 원뜻을 살리는 법은 미진한 불의의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신명아 경희대·영문학
라깡과 현대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컬리지 영어프로그램 디렉터를 맡고 있다. 『환상 가로지르기: 슬로보예 지젝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근간) 등의 역서와 『라깡, 사유의 모험』(공저) 등의 책을 냈다. 미국 플로리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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