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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수준에 머문 HK 연구성과…公共財로서 가치 있나?
담론 수준에 머문 HK 연구성과…公共財로서 가치 있나?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9.30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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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한국 기획시리즈 2. 인문한국 6년, 어젠다별 성과 점검

2006년 80여개 대학의 인문학위기선언에 대한 활로로 시작한 인문한국(HK)사업은 연간 약 432억(2013년 9월 기준)이 집행되는 대규모 인문학 지원 프로그램이다. 10년 장기사업으로 총 소요예산은 4천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사업시행 6년을 넘어서며 평가기준의 핵심인‘HK교수 채용률’로 인해 연구소 전임경쟁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인문한국사업이 단순히 전임으로 가는 우회로 사업으로 전락할 경우, 인문학 위기 선언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교수신문은 현 인문한국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외사례를 참고해 한국인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는 인문한국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 두 번째 기획은 HK 연구소들의 어젠다별 연구 성과가 과연‘인문한국’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점검이다.

2007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은 65개의 연구소중 현재 43개 연구소 중 인문분야 27개 연구소(대형 5개, 중형 22개)와 해외지역연구 분야 16개 연구소(중형 10개, 소형 6개)가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HK 연구소들의 어젠다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한국문화의 정체성(불교학, 주거) △지역(섬, 지리산, 로컬리티) △공공성(실학, 통일, 평화) △행복(인문치료, 의료인문학, 한국인의 감성체계, 생사학) △기록문자(인문언어학, 고전, 기호학) △아시아(문화아시아, 동북아시아, 동아시아) △문화교섭(문명의 텍스트, 트랜스내셔널, 개념의 전파와 수용, 번역, 비교문화, 탈경계) △세계(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등 8개의 범주에서 어젠다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기존 연구와 차별성 없는 연구 성과들

43개 HK 연구소들이 쏟아낸 성과물도 어마어마하다. 509권의 총서류를 간행했고, 2만여 건의 학술연구 데이터베이스 구축했으며, 1천92권의 저서와 327권의 번역서도 있다. 논문 성과는 A@HCI, SSCI 등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 257편, 국내 등재학술지 2천998편, 등재후보 학술지 447편 등 총 4천197편에 이른다(2012년 10월 기준).

정부지원사업에 있어서 투입된 예산이 있다면 성과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인문학 지원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HK사업의 6년차 성과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야 한다. 보고서 차원을 넘어서 인문학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인문학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와 함께 한국연구재단이 목표로 내세운 ‘세계적 담론의 생산소통을 주도할 연구소’라는 위상정립을 위해서도 HK 연구소의 화학적인 융합을 재점검해봐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우선 대량으로 출간되고 있는 총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목소리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HK연구교수는

“발행된 총서가 소위 연구소에서 내야 할 책들의 성격에 부합하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연구소의 정체성과 어젠다,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에 부합하며 연구소를 지속 발전시킬 수 있는 연구 성과가 아닌 것들도 많다. 지난달 2단계평가를 앞두고 연구소별로 총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도 의문스러운 지점이다”라고 말했다.

연구소의 어젠다 설정 자체가 무리했다는 보다 근본적인 지적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HK연구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발전과정을 놓고 보면, 개별연구, 토대연구, 일반연구가 있다. 기존의 3년 단위토대연구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일부 교수들이 HK사업 출범을 틈타 어젠다로 확장하고 연구소를 세운 것처럼 보이는 연구소도 있다. 연구가 진행중이니 성과물은 당장 확인할 수 없지만, 과연 이 어젠다가 HK사업의 본질에 맞는지, HK연구소를 세울만한 정당한 근거인지에 대해서는 제고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학계의 지적에 대해 한국연구재단도 일정 부분은 수긍하는 분위기다. 백민정 한국연구재단 연구과제관리관은 HK사업 출범 초기를 이렇게 말한다. “2002년에 시작된 기초학문육성사업도 10여년 정도 지속됐다. 여기 참가한 연구소들이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연구력을 쌓아왔고 기초학문 중점연구소로 자리매김했다. 인문학 위기 선언을 통해 HK사업이 구체화되긴 했지만, 초기 HK사업에 선정된 연구소들의 다수가 중점연구소 이력이 있거나, 기초학문 공동연구 3년 단위를 여러 번 해서 팀이 꾸려진 연구소들이다. 좋은 어젠다를 개발, 제시한 연구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연구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연구소들에 대한 지원은 모두 종료됐다. 2단계평가에서 ‘특성화’에 많은 배점을 준 것도 연구소의 질적 관리를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성과는 실제로 2단계평가에서 우수 연구소로 평가받은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소장 김천학)의 사례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는 하버드대의 ‘Oriental Series’기획에 공동 참여해 하버드대출판부를 통해 연구 성과물을 출판했는데, 이는 HK사업이 이뤄낸 좋은 선례로 평가받고 있다.

HK사업으로 역차별 당하는 중점연구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차 반환점을 돈 HK사업의 어젠다와 연구 성과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연구소의 체질을 재점검해 봐야한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교양학부)는 “모든 HK 연구소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중점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따라가지 못하는 HK 연구소들이 있는 것 같다. 또 단지 HK 연구소라는 이유로 비슷한 어젠다를 가진 다른 중점연구소보다 많은 지원을 받기도 한다. 이 경우 제도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잘 운영되는 중점연구소에 과감히 지원을 함으로써, HK 연구소들에게 학문적 긴장감을 유발시키면 어떨까”라는 대안도 제시했다. 그는 또 “연구소에서 연구원들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전임교수들이 전권을 휘두를 때 문제가 생긴다”라며 HK 연구소 운영 역시 점진적으로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중점연구소와의 자율적 경쟁 유도, HK 연구소 운영의 투명성에 대한 주장도 있지만, HK사업 방향 자체의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용례사전, 한국어 어원 사전, 믿을만한 정본도 없는 국내 실정에서 어젠다 위주의 연구소 운영이 한국인문학의 고른 토대 조성에 도움이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한 중진 교수는 “인문학이 공공재적인 성격에 맞기에 국가기금을 들여 지원하는 것인데, 과연 43개 연구소의 어젠다에 이런 고민이 스며있는 지 자문해 봐야 한다. HK사업의 연구성과물이 공공재적 지식이라는 고민이 처음 설계 단계에 없었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연구 어젠다에 끌려갈 수밖에 없고, 그들의 연구 성과는 담론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네이버, 다음 등에서 검색하는 수준으로는 국민의 귀로 먹는 양식이 매우 부실한데, HK사업 연구 성과물이야말로 학계의 인정을 받는 공공재적 지식으로 국민에게 서비스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HK사업이 현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진흥을 위한 법적 제도의 마련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초학제 연구 독립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말처럼 부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긍정적 측면이 더 많이 기대되는 것이 HK사업을 생각하는 대다수 교수의 바람일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좀더 큰 그림이다. 10년 뒤 한국인문학의 도약을 위해 6년차 반환점을 돈 HK사업이 어젠다에 얽매인 연구를 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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