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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에? 제도권 밖 대안공동체에서 돌파구 모색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에? 제도권 밖 대안공동체에서 돌파구 모색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9.23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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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계간지 가을호 리뷰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상기온과 전력난 가운데도 유난히 폭염의 기세가 강하고 길었던 지난 여름을 계간지들은 어떤 고민으로 보냈을까. 총체적인 원전 비리 사태, 빚 내 집사기를 강요하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일으킨 국정원 사태,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덮어버린 현직 국회의원의 내란 음모 사건까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지난 여름은 계간지들에게 이 비현실적인 현실을 헤쳐 나갈 해답을 요구했다. 가을 계간지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특집 주제별로 묶어서 살펴보면 이들은 문학의 내면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거나(<문학동네> 76호, <오늘의문예비평> 90호), 국가나 대학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체제에 대한 대안을 일상에서 모색하거나(<역사비평> 104호, <창작과비평> 161호, <황해문화> 80호), 한국과 중국에서 정보가 어떻게 권력을 획득해 가는지를(<문화과학> 75호) 다뤘다.

<문학동네> 76호는 특집으로 ‘지금,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내세웠다. 문학계와 비평가에 대한 비판이 제법 날 서 있다. 김영찬 계명대 교수(한국어문학과)의 「폐허 속에서, 오늘의 비평」은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은 아비에 저항하기보다 아비의 품속에서 비로소 안도하는 아이의 표정이라고 말한다. 세계를 상대하는 힘든 싸움에 나서기보다 폐쇄적 문학제도 속에 편히 안주하는 길을 택한 문학계를 질타한 것이다. 황정아 한림대 HK교수(영문학) 역시 「비평의 위기, 비평의 정치」에서 비평의 예정된 위기를 거론한다. 그는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계기가 돼 비평 공간에서 문학의 저항성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그 저항성을 폄하했다고 말한다. 이어 랑시에르도 소환한 황 교수는 “문학이 어떤 변화를 맞이할 때 이를 감지하고 분별하고 설명하는 것은 마땅히 비평의 임무”지만 “비평이 강박적으로 새로운 것의 등장을 말하고 시대적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폐쇄회로의 징후처럼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 사회, 경제 환경 자체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한 오늘. <오늘의 문예비평> 90호는 바로 이 새로움의 조건을 묻는 의미에서 특집 ‘이야기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준비했다. 새로운 문학(예술)의 자리를 향해 탈영토화되고 있는 서사의 행방과, 예술의 장르혼합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폐쇄적 제도 안에 안주하는 문학계 질타

전성욱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의 「(불)가능한 이야기들의 역사」는 사망 직전에 이른 소설의 운명을 역사철학적 맥락에서 복원하고 있다. 그는 “파국과 승천이라는 타나토스의 기운이 승천”하는 “한국의 문학판”에 치친 독자들에게, 아즈마 히로키의 서사론을 새롭게 읽으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성면 인하대 연구교수(현대소설)의 「한국문학에 장르문학을 許하라」는 장르문학을 문학사와 창작방법론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 자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의 공조와 대립, 억압과 저항 속에서 ‘소설’은 ‘서사’의 경계를 허물어 가고 있으며, 이는 김중혁, 배명훈, 최제훈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3년 전 가을에도 ‘대학의 붕괴: 기업화, 서열화, 지성의 몰락’을 주제로 대학을 특집으로 다뤘던 <역사비평> 104호는 다시 한 번 대학에 주목했다. 특집 ‘대학과 연구자’에 수록된 5편의 논문 중 3편은 대학 내부에 대한 성찰로 지난 특집의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학문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하고 있는 2편의 글이 눈길을 잡아끈다. 심광현 한예종 교수(영상원)의 「진보적 대안대학의 전망-지식순환협동조합 설립운동을 중심으로」와 장훈교 데모스 연구위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과)의 글이 그것이다. 서양에서 시작한 대학의 모태는 학문 연구자간의 공동체였다. 두 논문은 협동조합이라는 ‘오래된 미래’에 기대어 학문공동체의 미래를 변모시키려는 현재진행형의 노력을 담고 있다. 심광현 교수는 현재 자신이 참여해 추진 중인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모델을 통해 현존 대학교육 시스템과 사설 교육기관과 다른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차별성은 △교육내용의 차별성: 통섭형 교과구성 △교육과정의 차별성: 이론-실천-개인의 변화 선순환을 촉진할 순환형 교육과정 △교육방법의 차별성: 다차원적 협력교육 △교육조직의 차별성: 상호부조 교육조직 등이다. 장훈교, 조희연 역시 그들이 속한 급진민주주의 연구조합 ‘데모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대안 상상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조금 더 구체화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보인다.

<창작과 비평> 161호는 그동안 우리 사회 저변에서 꾸준히 성장해오던 ‘녹색’ 담론을 ‘생태담론과 사회변혁’이란 특집으로 꾸려 정치권과 행정부에게로 향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과학사)의 「에너지전환은 생태적 변혁의 첫 걸음」에서 원자력의 확대냐 폐기냐의 찬반구도에서 나아가 ‘에너지전환’이라는 변혁으로 관심을 넓힐 것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의 ‘탈핵’ 진영이 에너지전환이라는 장기적 전망을 갖지 못할 경우 ‘원자력 진영’의 프레임에 쉽게 종속될 수 있으며, 마치 대안처럼 제시되는 ‘신재생에너지’나 ‘고정가격구매제’, ‘의무할당제’ 등이 모두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비현실적이거나 실효가 없음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과 스웨덴의 성패사례, 서울시의 원전 1기 줄이기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도 있어 일독을 권한다. 또한 하승수 변호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기후변화와 녹색정치」에서 오늘날의 기후변화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유명무실한 기후변화협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적 협력체제(세계환경기구), 기후변화 문제를 핵심임무로 삼는 정치세력의 존재(녹색당), 그리고 지역 차원에서의 다양한 실험(심의민주주의나 시민회의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원전 찬반구도보다 '에너지전환' 구도 전환

대학 제도권과 정치 속에서 대안을 모색했던 <역사비평>, <창작과비평> 두 계간지보다 <황해문화> 80호는 우리의 일상을 내밀히 들여다봤다.  ‘우리 시대 공동체운동의 양상과 의미’를 특집으로 내세운 <황해문화> 80호에서 박찬숙 씨의 「어느 원조귀농민의 30년 촌살이 보고서」는 각별한 의미와 두께를 갖는다. 1980년대 귀농한 농민운동 1세대인 그가 수없는 좌절과 부침 속에서도 농협 복수조합원제 실시, 여성농업인센터 설치 등 여성농민운동을 위해 묵묵히 해 온 과정이 무게감 있게 읽힌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가 됐던 성미산의 주민 위성남 마포마을넷 운영위원장이 쓴 「도시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성미산 마을」은 앞션 박찬숙의 글과 대비되는 지점에 있다. 익명이 불가능한 농촌에서의 스며듦과 달리 독자성을 인정한 성미산의 수평적 관계고리는 도시 코뮨의 문제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문화/과학> 75호가 특집으로 내세운 ‘정보자본주의’는 지난 6월 서울과기대에서 중국 상해대 당대문화연구소와 함께 교류한 학술세미나가 토대가 됐다. ‘정보자본주의’가 일국의 문제가 아닌 초국적 문제로 인지하고, 동아시아 정보자본주의의 흐름을 한국과 중국의 비교연구를 통해 조망한 것이다. 총론 격에 해당하는 백욱인 서울과기대 교수(사회학)의 「한국 정보자본주의의 전개와 정보자본주의 비판」는 한국 정보자본주의의 기원부터 전개, 이용자 주체의 형성, 그리고 정보자본주의 문화의 형성과 특성 및 사회운동의 양상에까지 주목하고 있다. 백 교수가 특히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은 바로 ‘금융자본’이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육체와 결합하지 못하는 사이버스페이스 활동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안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웹 플랫폼 등을 통해 수취한 기호의 디지털 축적물을 자본의 축적으로 전환시키는 매개물일 뿐인 금융자본에 대해 실물과 실체를 연결하라고 촉구한다.

그렇다면 이를 실천하는 정보자본주의의 주체의 형상은 무엇인가. 조동원 <문화/과학> 편집위원의 이어지는 논문 「정보자본주의에서 이용자 주체의 포섭」은 정보자본주의 체제의 부상과 함께 ‘주체로서의 이용자’에 주목한다. 그는 1980년대 초중반 PC의 보급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정보자본주의 체제의 역사를 따라가며,이 주체들을 각각 ‘이용자-정보소비자’, ‘저자-정보생산자’, ‘해커-정보파괴자’로 구분하고 있다. 특히 정보사회의 파괴자로 인식되는 해커의 존재를 단순한 범죄자 이미지의 통념을 넘어, 오늘날 생산 참여적 이용자 문화가 활성화된 상황에서 정보자본주의의 포섭과 배제의 과정에 끊임없는 균열을 내는 대안적 주체로 새롭게 조망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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