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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민족경제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민족경제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병천 강원대
  • 승인 2002.09.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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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소용돌이 헤쳐나갈 ‘민중적 민족주의’ 큰 유산

[편집자 주]
1934년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 시절 민애청 활동, 1950년부터 2년간 빨치산 활동,
서울대 강사로 있었으나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9년 ‘임동규간첩사건’에 연루돼 1년을
복역했다, 이후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 사람의 생애라고 보기에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인생의 주인공이 바로 故박현채 교수이다.
1970∼19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가로, 빼어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현채 교수는
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민족경제론’은 1978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까지 일련의 형성된
박현채 교수의 경제학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민족경제론은 민족주의적·민중적 관점을 총괄한
경제이론이라 위치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채 교수 스스로 인정했듯이 민족경제론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를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그러한 점에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도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박현채 교수와 그 이론의 면면을
후학 연구자들, 평소 그가 남긴 인상, 학계의
현재적 평가 등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병천/강원대·경제무역학부

이른바 ‘동아시아 기적’과 위기를 겪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오늘날, 우리는 다시 민족경제론을 끄집어 내어 무엇을 할 것인가. 민족경제론은 우리에게 금융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어떤 이론적 요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민족경제론이야말로 경제학의 우리 이론에 합당하다고 말들을 하지만, 깊이 있는 연구는 부족한 가운데 이견은 많고 합의는 적다. 그러나 분명한 쟁점과 상이한 입장들이 제기됐고, 한국 경제학의 발전과 한국경제 연구를 위한 여러 과제들도 제시됐다. 최소한의 논의 기반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 어떤 통일된, 수미일관한 이론적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내적 변모 및 모순에 주목하는 편이다. 우리는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NLPD)론-국가사회주의론으로 재무장하고 민족경제론의 거대이론으로의 체계화에 착수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후기 박현채보다는, 오히려 박정희 개발 독재와 대항하면서 오오츠카 비교경제사학의 비판적 수용에 의해 민주적, 내포적 자본주의론-민중적 민족주의론을 제시한, 그리하여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도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진보적 발전 경제학자로서의 전기 박현채의 면모에 더 주목한다. 이는 후기 박현채를 전면 기각하고 전기 박현채를 전면 수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전기 박현채의 ‘국민경제와 민주주의의 정치경제학’쪽에 비판적 계승의 잠재력이 훨씬 크다는 뜻이다.

‘동아시아 기적’의 해명 실패

민족경제론은 식민지 종속형 근대 경제의 역사와 구조적 특성을 해명하고, 이를 통해 ‘민중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고자 한 데 기본 문제의식이 있었다. 박현채에 따르면 식민지 종속형 경제에서는 선진 자본주의형에서와는 달리, 해당 지역 안에서 일어난 경제 성장과 그 지역 주민 또는 민족의 경제적 이해간에 근본적인 괴리가, 즉 ‘국민경제와 민족경제간의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단지 경제 성장 과실의 분배구조만이 아니라 전체 경제 구조와 계급 구조 등에 특수한 파행성과 왜곡을 각인시킨다. 그런데 근대 경제학 또는 경제성장론은 물론이고 정치경제학에서도 고전 이론만으로는 이 괴리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 의식과 이로부터 제시된, 식민지 종속형 근대 경제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여러 설명들 (수직적 국제 분업, 국민경제의 동질적 통합의 파괴, 시민혁명의 결여, 희화적 근대화와 낡은 유제의 온존 등)은 민족경제론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박현채는 일본 강좌파, 특히 오오츠카 비교경제사학과 국민 경제 유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식민지 종속형 경제구조론 또는 경제 형태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논쟁적 진술이지만, 종속이론과도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정치경제학의 역사를 돌아 보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기본 체계는 국민국가를 사상한 높은 추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국민국가 수준에 상응하는 국민경제론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다. 국민경제론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킨 것은 레닌이었고, 아시아에서는 특히 일본 강좌파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종속 사회의 주체적 관점에서 식민지 종속형 경제 구조론을 발전시키고자 한 중요한 시도는 종속이론이었다.

물론 종속이론은 외인론으로 기울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오오츠카 사학과 강좌파의 이론을 수용한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은 종속이론과 흐름을 같이하면서도 일국 경제 내부 구조의 특성을 더 천착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재생산구조, 성격, 발전 단계를 일국 자본주의 분석의 세 개의 고리로 삼은 것은 그 대표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적어도 식민지 종속형 경제의 구조적 특성의 해명이라는 문제 의식과 이론적 지향으로 보면 정치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민족경제론과 종속이론은, 대립점도 있지만, 다분히 보완 및 우호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 민족경제론은 종속이론과 더불어 ‘동아시아 기적’의 해명에 동반 실패했다. 이는 민족경제론에 가히 치명적이라 할 맹점에 속한다. 왜 민족경제론은 ‘동아시아 기적’, 좁혀서 한국 박정희 시대 자본주의 산업화와 국민 경제의 역사적 형성에 대해 설명력을 보이지 못했는가. 이 이론적 실패의 뿌리는 깊은 것 같다. 경제 이론 측면에서 보면 민족경제론의 이론 구조는 유형론이나 형태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발전론의 논리가 취약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민족경제론만이 아니라, 그 모태가 된 오오츠카 사학이나 강좌파 이론에서도 보이는 이론적 약점이다. 그렇지만 민족경제론에 발전론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경제론의 발전론은 내포적, 수입대체 공업화-중공업 우선-상대적 자급자족 체계론이다. 이런 발전 전략의 관점에서 박현채는 박정희 모델에 대해, 개발 계획을 통한 고도성장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수출 입국형의 외연적 불균형 성장’ 유형으로 파악하면서 종속적 재생산 또는 ‘종속 심화’ 경향을 주장했고, 국가주도에 의한 국민경제 형성의 현실적 실현 경로를 과소평가했다.

인식적 문제와 이론의 현재적 의미

박현채가 ‘국가 주도 개발 경제체제’, 또는 ‘국가 자본주의적 성장 정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의 개입 정책이 그에 앞선 이승만 ‘약탈 독재 국가’ 시기처럼 부정 부패와 비생산적 축적으로 흐르지 않고 어떻게 산업화 도약의 핵심 요인이 될 만큼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체제의 영향을 일면적으로 압박 요인, 또는 ‘후발성의 불이익’ 요인으로만 파악함으로써, 개발국가에 의한 ‘전략적 개방’과 ‘후발성 이익’의 활용이, 비록 미국의 ‘헤게모니 한계선’ 에 걸려 있다 해도, 후발 캐취업 산업화와 국민경제 형성에 큰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요컨대 민족경제론은 개발 국가의 대내외적 자율성과 개발주의적 개입 능력, 그리고 수출 지향과 수입 대체가 결합된 복선형 개발 정책의 강점을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5·16 정권, 나아가 8·15로 수립된 남한 정부를 바라보는 민족경제론의 인식상의 문제가 존재한다. 박현채에 따르면 과거 식민지 종속국이었던 나라들의 전후 발전 유형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사회주의 국가로 된 유형, 둘째 선진자본주의 지원아래 서방 세계에 잔류하면서 주권을 회복한 유형, 셋째 소시민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있는 유형이 그것이다. 둘째 유형은 주권 회복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전후 점령군의 후원아래 매판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경우로서, 민족주의의 고양을 배경으로 흔히 군사 쿠데타에 의해 새로운 유형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박현채는 이들 유형 중 한국을 ‘서방 세계 잔류형’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전후 한국의 국가 권력은 현상적으로 약간의 변화가 없진 않았으나 민족주의의 형식만을 간직한 채 매판 세력, 그리고 외세와 결합함으로써 셋째 유형으로의 전환 없이 서방 세계 잔류형으로 정체, 고정화됐다고 보았다. 5·16 정권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소시민적 민족주의 지향이 있었으나, 이는 빠르게 후퇴, 실종했다고 보았다. 남한 정부와 5·16 정권에 대한 박현채의 이러한 이해는 그가 민족 해방(NL)파적 견해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리하여 5·16 정권이 주도한 냉전 국가주의 개발독재, 기적과 야만의 양면성을 간직한 ‘반동적 근대화 수동 혁명’의 역사는 그의 역사적, 이론적 시야와 射程을 비껴나게 되었다. 더욱이 후기 박현채는 개발도상 경제에 엉뚱하게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적용했고, 그러면서도 ‘국독자’의 외부 규정성 명제로서 여전히 NL파적 견해를 유지했다. 학계 일부와 운동권도 국독자론으로 몰려 들었다. 이 역사가 가르치는 공부거리는 실로 많다.

민족경제론 거대 체계의 핵심을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민족경제’와 ‘당위로서의 민족경제’개념은 어떤가. 만년의 박현채는 민주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길을 거부하면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나라들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파산하기에 이른 바로 그 시점에서 ‘당위로서의 민족경제’의 궁극적 지향점이 국가사회주의임을 명백히 했다.

‘존재로서의 민족경제’ 개념 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후기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의 핵심 테제로서, 지역적 개념으로서의 국민경제 안에 민족적 생존권을 뒷받침하는 경제 영역으로서의 민족 경제와 민족적 생존권을 제약, 축소, 소멸시키는 경제 영역(외국 자본 및 그것에 동조하는 매판 자본의 활동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민족적 생존권을 뒷받침하는 ‘존재로서의 민족경제’는 ‘당위로서의 민족경제’를 지향하는 정치 운동의 물질적 기반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존재로서의 민족경제’ 개념은 늘 필자를 곤혹스럽게 해 온, 지극히 실체를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민족경제론은 전면 폐기, 전면 계승의 이분법의 대상은 아니다. 분명 이 ‘우리 이론’의 중요한 부분은 죽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경제학은 민족경제론의 폐허 위에서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한국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시작은 민족경제론의 역사적 유산에 빚짐이 없이는 어렵다. 우리는 민족경제론의 유산을 딛고 넘어서야 할 것이다. 역사학의 내재적 발전론이 그러하듯이.
거대 체계 속의 수수께끼같은 ‘존재로서의 민족경제’ 개념 말고 식민지 종속형 경제구조론에 밀착되어 분석적으로 재가공된 ‘존재로서의 민족경제’ 개념, 그리고 파산한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국가사회주의론 말고 시민사회-시민 정치론과 동행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민중적 민족주의’의 깃발을 다시 부여잡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는 민족경제론의 새로운 재생의 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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