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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과학·기술이 유물보존의 요체죠”‘백제금동대향로’ 논란 잠재운 외곬 學人
“안목·과학·기술이 유물보존의 요체죠”‘백제금동대향로’ 논란 잠재운 외곬 學人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9.0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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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源流를 지키는 사람들_12. 문화재 보존과학 - 안병찬 고려대 연구교수

▲ 경주 천마총 장니


1971년 7월의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은 20세기 한국 고고학 발굴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발굴을 통해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한 유일한 예다. 그러나 무령왕릉 발굴은 이런 의미와는 별도로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이기도 하다. 무덤 발굴 전에 기자들의 내부 취재를 허용하기도 했고, 17시간 만에 ‘개봉’에서 ‘유물 수습’까지를 서둘러 해치웠다. 큰 유물만 대충 챙기고 나머지는 자루에 쓸어 담아 나올 정도였다.

발굴보다는 그저 쓸어 담았다. 후유증은 컸다. 예컨대 무덤에서 나온 3천여 개의 구슬은 마구 섞인 채 수습돼 본래 형태나 용도를 알 길이 없는 채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무령왕릉 발굴의 이 참담한 실패는 고고학 발굴에서 무엇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절감·인식케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바로 문화재 보존과학이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과학을 위한 연구와 전문가 양성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문화재보존과학 중요성 일깨운 ‘무령왕릉’ 발굴
안병찬 교수는 이런 과정 속에 연구와 노력을 경주해 이 분야에 매진하고 있는 연구자이자 전문가다. 문화재 보존과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개념은 있다. 오랜 세월에 손상을 입은 문화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조사·연구하고 안정된 상태로 ‘치료’하는 학문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병찬이 생각하는 보존과학 개념은 좀 더 넓고 포괄적인 것이다. 그는 보존과학에 앞서 몇 가지 전제를 강조한다.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과학지식, 그리고 기술이 그것이다.

“문화재 보존과학이라고 하면, 조상들이 남겨놓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서 후세에 넘겨주는 일을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문화재가 손상된 이유와 과정, 앞으로의 예측 등을 과학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과학도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문화재를 가장 적합하게 조치를 취하기 위한 인위적 처치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교한 손, 그러니까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과학적인 머리와 또 문화재를 잘 알아보는 안목, 문화재 속에 내포된 조상들의 지혜나 다양한 문화정보를 소중히 알아야겠다는 마음가짐, 예술적인 안목도 필요한 정교한 손,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진 것, 그것이 바로 보존과학이다.”

▲ 백제 금동대향로
안병찬은 동국대에서 불교미술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이런 전공이 그가 하는 보존과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문화재가 가지고 있는 게 여러 가지가 있다. 古代 과학도 있지만, 고대 장인들의 예술적인 감각도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과 과학으로 이뤄진 동체란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고대 정보에 조금씩 다가갔다.

역사학적인 정보와 과학, 그리고 미학도 공부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공부를 했던게 가장 중요했던 것 같다.” 안병찬이 문화재보존과학 분야의 일을 해오면서 고고학적 해석이나 유물에 관한 해석에 해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대향로에 대한 중요한 해석과 정의를 내려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반론은 없다. 백제의 유물이었지만,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독특한 형태의 이 대향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백제의 것이 아니고 중국제가 아닌가하는 게 그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 논란을 일시에 잠재운 장본인이 당시 이 유물을 처리한 안병찬이다. 그는 포인트를 향로의 향 구멍에서 찾아낸다. “당시 10개의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니 보수한 흔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향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확장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끌로 늘인 기술과 향로 하단 무늬의 ‘조이질’ 기법은 우리나라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단언했다. 이 향로는 백제 장인이 만들었다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역시 그의 손을 거친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금동사리함에서, 사리함이 여러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 조립품이고, 그 구성부품의 연결을 장인들끼리 알기 쉽게 부품에 표시를 해 놓은 것을 발견한 것도 안병찬이었다. “정말 놀라웠다. 부품을 보면 조립을 할 수 있게돼 있다. 그런데도 절대 실수 않도록 부품들의 연결 부위에 끌로 조절감 있게 살짝 때려 자기만의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이 일을 한지 10년 후부터 문화재 유물에서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웃음)” 무령왕릉도 안병찬과 관계가 깊다.

▲ 안병찬 교수의 보존과학에 관한 연구저작물들.

발굴 후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중대한 발견을 한 것이다. 왕비의 머리받침에서 묵서체의 ‘甲, 乙’ 두 글자를 알아낸 것이다. “머리받침 양 옆에 봉황이 있었는데, 그것을 들쳐 낸 자리를 적외선 카메라로 보니 두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이 유일한 백제의 묵서다. 근 20년 간 사람들이 그렇게 봐 왔지만 안 보였던 것이 내 눈에 나타난 것이다.” 안병찬은 보존과학에서 과학의 중요성도 당연히 강조한다. 과학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영역이 보다 더 확대돼 있다. 문화재보존과학의 영역이 100이라면 과학이 한 50 정도 된다. 나머지 50은 예술과 고대정보다. 과학의 영역은 갈수록 그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1981년 황남대총 봉수병 처리 두고두고 애석
안병찬은 문화재 보존과학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보존처리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과 원상회복과 관련한 노력 및 조치가 그것이다. 보존처리를 너무 똑 같이 하면 어느 부분이 후대에 손을 댔는지 모르기 때문에 후대에 손을 댔다는 부분을 분명하게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물의 원상, 그러니까 ‘고유성(originality)’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보존처리를 위해 쓴 물질들은 필요시 제거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원상회복능력을 북돋우기 위한 조치다. 당대에 사용한 재료물질이 수십 년, 수백 년 후 어찌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안병찬은 이와 관련해 지금도 애석해 하는 일이 있다.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과학을 처음 시작할 무렵인 1981년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병의 보존처리를 맡았다. 3년 간 진행된 이 작업에서 안병찬은 에폭시 접착제를 사용했다. 고분자 물질인 에폭시는 당시만 해도 그 것을 제거할 용액이 나오지 않았었다. 그 에폭시로 안병찬은 조각이 난 유리 봉수병을 접착해 거의 똑 같이 복원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됐다. “사용한 에폭시 수지가 상당히 오래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10년 만에 누렇게 변색이 된 것이다. 지금은 더 누렇게 됐다. 원래 봉수병은 유리병이니까 약간의 녹색 기를 띠고 있는 반투명한 유리재인데, 깨진 곳을 떼운 부분에 누런 흔적이 남고 말았다.

그것만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년 이상을 보존과학 분야에서 일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손을 거쳐 간 문화재 유물은 얼마나 될까. “1만점 정도 될까. 글쎄 정확하게 세 보지는 않았는데, 최소한 오천 점은 될 것이다. 이 가운데 국보급이 한 50점. 나 같은 사람 앞으로 영원히 안 나올 거다. 자랑삼아 하는 말은 아니고 그 때 당시가 그랬다. 일 할 때 중앙박물관에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전국의 모든 국립박물관 일을 맡아서 했으니까…….” 안병찬의 손을 거쳐 수습되고 보존 처리된 국보급 문화재 가운데는 위에서 언급한 경주 황남대총 봉수병(국보 193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국보 123호), 그리고 경주 천마총 장니(국보 207호) 등이 포함돼 있다.

▲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순금금강경판

20여년간 문화재 1만점처리…국보급만 50여점
그런 그를 문화재보존과학 분야에 종사하게 만든 것은 어느날 스승으로부터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물론 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할 때도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는 각별한 스승이 여러분 있다. 대학 다닐 때 건축사를 가르친 김동현 선생, 박물관학을 가르친 이난영 선생, 그리고 미술사를 배운 문명대 선생이 그들이다. 미술사를 가르친 문명대 선생이 보존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앞날을 제시하고 그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추천했던 것이다.

 198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일을 시작한 안병찬은 우리나라 문화재보존과학 분야의 제 2세대다. 이 분야의 제1세대 인맥은 조금 척박하다. 안병찬 위로 故 이상수 선생과 이오희 교수 등 한 두어 명에 불과하다.

보존과학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만큼 거들떠보지도 않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차별도 많이 받았다. “고고학계나 사학계, 미술계 등에서 이를테면 기술자나 쟁이로 여기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일을 같이 해도 어떤 사안에 토를 달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는 정도였다. 그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일에 필요한 기계 등 물품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런 걸 일일이 다 헤쳐 나가면서 지금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 어렵고 고생스러웠지만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있다.”

그는 이상수 선생으로부터 일을 배웠다. 이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내 밑에서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선생은 고졸 출신이었다. 그 학력에 하는 일도 그것이었으니 그 어려움을 갓 들어온 안병찬에게 털어놓으면서 굳센 마음가짐을 당부한 것이다. 안병찬은 근자에 유물의 착색제 등으로 쓰여진 전통 천연 顔料 연구에 천착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물론 안료에 대한 연구도 문화재보존과학의 연장선에서 그 중요성과 역사성에 안목을 가진 결과다. 그가 안료에 매료된 데도 우연한 계기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떠나 경주에 있는 경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게 그것이다. 박물관과는 달리 유물이 없는 학교에서 일을 하자니 상실감이 왔다. 그 틈을 채워준 게 바로 안료에 대한 연구였다.

“경주와 가까운 포항에 뇌성산이 있는데, 우리 유물의 전통 녹색이 옛날부터 거기서 나온다고 하더라. 건축사를 강의하는 동료교수가 그 말을 하기에 같이 가서 녹색 빛을 내는 천연 안료를 확인했는데, 그때부터 안료 연구를 시작했다. 국내 천연안료에 대해서는 단청하는 분들이 알고 있는데, 그분들의 지식은 나의 상식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뛰어 들었다.”

▲ 경주 황남대총 봉수병. 안교수는 유리재질의 이 병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에폭시를 접착제로 썼다. 그러나 이 접착제로 붙인 부분은 10년이 지난 후 누렇게 변했다. 안교수는 이를 두고 두고 가슴아파 한다.
그는 뇌성산 천연안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2008년에 논문 「전통 녹색 석채로 사용된 뇌록(磊綠)의 특성연구」를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전통안료 연구를 위해 『신승동국여지승람』, 『日省錄』 등 각종 역사서나 조선조 궁중의 의궤를 뒤져 탐사를 통해 그 원산지를 파악했다. 붉은 색을 내는 石間朱의 원료인 朱土도 “주토는 울릉도에서 난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탐사해 ‘朱土窟’을 발견해냈다.

주토굴은 조선시대 물산지도에 ‘주토굴’이라고 딱 박혀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천연안료의 현재적 실용가치도 물론 있다. 그러나 안병찬은 원산지 천연안료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인 유물인 만큼 그대로 보존하자는 입장이다. 그것들과 똑 같은 물성의 천연물질이 칠레나 아르헨티나, 그리고 아프리카에 많이 있으니, 그 걸 싸게 수입해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磊綠’보다 퀄리티가 좋은 ‘石綠’을 연구 중에 있다.

천연 안료 연구에 매진 … 경주대 떠난 사연
안병찬은 현재 고려대 문화재복원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있다. 연구소 소장인 정종미 교수와 함께 연구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경주대 문화재보존학과에 있던 그가 어째서 고려대 문화재복원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는 걸까 의아했다. 그는 1956년생이니까, 올해 쉰일곱의 나이다. 한 참 일할 나이다. 그의 말로도 “나는 아직 왕성하다.” 그러나 그 활기찬 말속에 약간의 페이소스가 담겨있다. 그는 아픔을 겪었다. 경주대에서다. 2002년에 그 대학으로 갔다가 2012년 일방적으로 해임됐다. 학교 재단과의 불화인 것 같은데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 학교 재단이 그렇고 그렇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수 품위를 지키지 않았고, 또 학교에 해를 끼쳤다는 게 해임의 사유인데, 나는 그 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 고법에서 이겼고, 지금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이길 것이다. 이겨도 재단에서 안 받아 줄 것이다. 그러면 민사로 가야하는데 한 2년 잡고, 그 때쯤이면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 때 마음 다 잡아 열심히 일할 것이고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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