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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의 약탈과 法文史哲法學
정신문화의 약탈과 法文史哲法學
  • 김지수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동양법문사철학
  • 승인 2013.08.20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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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전주고에 들어가 최고 큰 배움의 인연은 지금 돌아보니 한문이었다. 귀거래사, 출사표, 적벽부를 외우며 옛 현인의 쇄락한 기질과 호방한 회포와 피 끓는 우국충정이 감명깊었다. 서울법대에 간신히 들어간 해 부친상과 국상까지 겹쳐 온통 침잠한 분위기에서, 잠시 고조된 민주화 열기는 5·18로 급랭했다. 툰드라의 계절 동안 나는 고시의 길을 접고 좋아하는 한문을 벗 삼아 중문학부전공을 시작해 고등교육재단 한학연수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배웠다.

대학원을 중문과로 가려다 은사님의 만류로 법학과 석사과정에서 조교를 하며 조선 全家徙邊律로 석사학위논문을 쓰다가 만성간염을 얻어 군대까지 면제됐다. 한국법제사를 깊이 알기 위해선 중국법제사 연구가 절실해 박사과정에 들어가 천신만고 끝에 대만대 유학길에 올랐다. 3년간 법제사·법사상 외에 중국고전을 폭넓게 섭렵하며 혼자 조용히 침잠한 여유가 좋았으나, 건강과 체력이 바닥나 마지막 6개월은 도량에 박혀 수행기도에 전념해 채식과 學道에 빠져들어 기사회생하는 인연이 됐다.

귀국 복학해 국사학과와 철학과의 수업을 들으며 법의 文史哲學을 꿈꿨다. 매일 수행하며 이틀에 한 번씩 관악산에 올라 천지자연과 성현들의 호연정기로 묵묵히 법의 道學체계를 구상했다. 박사논문 초고는 너무 거창하다고 퇴짜 맞고 일부를 구체로 현실화해 가까스로 통과했으니, 人情·天理·國法의 삼위일체로 조망한 전통중국법의 정신이다.

체력과 정신까지 바닥나 악성빈혈에다 지도교수와의 갈등이 도져 잠시 쉬면서 모교를 비롯한 교수 공채에 지원했으나 잇따라 퇴짜를 맞았다. 전공이 희귀해 수요도 희소한 까닭도 있으나 세속과 어울리지 않고 채식하며 도 닦는다고 왕따 당한 탓도 컸다. 7년 가뭄에 19번 응모 끝에 전임이 됐으나 처음에는 대학의 일반수요에 따라 강좌를 맡고, 나중에는 로스쿨 도입한다고 어수선한 시절 인연으로 정작 내 전공을 깊이 천착할 시간과 체력 여유가 거의 없어 아쉬웠다. 그나마 전통법의 큰 틀과 주제를 윤곽이라도 그리겠다는 처음 구상을 틈틈이 조금씩 작업해서 다행이다. 허나 이제 박사논문 초고의 손질마무리와 불교법철학 연구의 대업이 기다리는데, 쉰 살이 넘으며 몸과 마음이 쉬는지라 안타깝다. 유불선 삼교합일의 원융무애한 사상회통을 법의 관점에서 시원하게 맛보고 싶은데!

몇 년 전 한학연수 동창모임에서 기호논리학 전공자가 얼굴이 너무 변해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철학전공인 지도교수가 가장 많이 변한 건 나라고 지적하셨다. 세속법 전공자가 도학과 佛法에 심취했으니 이보다 더 큰 변화가 어디있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뜸, 세속법의 원천을 찾아 우주의 자연법까지 나아간 건데 당연한 발전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좌중이 할 말 없이 아주 조용해졌다.

불교의 진리 Dharma를‘法’이라 옮긴 이유는 뭘까? 또‘戒律’은 뭐지? 세속의 법률과 어떤 관계일까? 아직 속단하긴 어려우나 ‘法’은 우주만유의 보편원리로서 자연법이고, ‘戒律’은 권선징악의 법률에 대체로 상응하는 듯하다. 좀 거창한 허풍이지만, 나의 법학은 문사철학을 두루 거쳐 마침내 佛法學에 이르러 원만해질 느낌이다. 바로 法文史哲法學이다! 모든 학문이 하나의‘道’에서 생겨났으니 도학의 경지에 이르러야 완전히 통달하리라. 도학이란 구체로 전공학문을 연구하면서 각자 마음수양을 통해 본디 밝은 덕을 밝히는 ‘明明德’에 이르러 걸림 없이 원만해지는 경지리라.

요즘 학계가 말하는 통섭과 융복합학도 서양학문의 꽁무니를 쫓아 흉내내는 꼴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양학자들이 동양의 도에서 보배를 찾아 살짝 풀거나 바꿔 도용해먹는 판에, 우리는 그게 무슨 대단한 창의와 혁신인 줄 알고 비싼 값을 치르고 앞다퉈 사온다. 저작권과 특허라는 법치를 내세워 정신문화를 약탈해 경제수탈까지 병행하는데, 서로 그 앞잡이노릇을 선수 치려 혈안이다. 기특한 개성은 따돌리고 끼리끼리 수군대며 전시용 흥행거리나 벌이는 판에 학문의 식민지배는 언제 어떻게 벗어날까.

우리는 선조가 주창한 東道西器의 주권마저 빼앗겼다. 제 집의 七寶를 두엄자리에 처박아두고 남의 집 머슴살이로 새경이나 얻어먹는 꼴이랄까! 咄咄!

김지수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동양법문사철학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전통법의 정신』,『 유불선 인생관』, 주요 논문으로「사회적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으로서 법의 비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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